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Excerpt

창조 기사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흑암’, ‘깊음’ ‘수면’ 등 어휘들은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표현들이다. 창세기의 창조 직전 상황은 혼돈이며 ‘창조’의 개념은 혼돈의 괴물을 무찔러 싸우는 창조자의 승리의 결과, 즉 신적 질서였다.

창세기에 숨겨진 고대 근동의 세계관

고대 근동의 창조 과정은 물로 상징되는 혼돈의 괴물과 신의 전쟁이며 질서로 귀결되는 신의 승리 이야기이다. 

chaos monster and sun god
Chaos and Sun God

창세기 1장 1절에 따르면 하나님(엘로힘)은 ‘하늘'(샤마임)과 ‘땅'(에레츠)를 창조했다. 그리고 2절에서 ‘그 땅’이 혼돈했고 공허했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이어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묘사한다.

흑암‘은 어두움이다. 그 어두움이 덮고 있던 것은 ‘깊음‘이란 것인데,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는 ‘테홈‘이라고 한다. 개역개정이 ‘깊음‘으로 번역한 이 단어는 문화적 맥락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사안이 몇 가지 있다.

테홈‘은 ‘심연‘이란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심연은 한없이 혹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어떤 것이며, 주로 바다의 깊음을 묘사할 때 쓰는 말이다. HALOT등의 히브리어 사전에는 abyss라는 말로 소개되어 있으며, 원시 바다(primaeval ocean) 혹은 원시 홍수(primaeval flood)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테홈‘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바다라든가 혹은 원시 바다라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테홈‘은 ‘티함‘ 혹은 ‘티하맛‘이라는 ‘셈어’에서 주로 ‘바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며, ‘티아맛'(Tiamat)이란 표현은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라는 고대 바빌론의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따라서 ‘테홈‘은 ‘티아맛‘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이 신화에서 ‘티아맛‘은 고대의 혼돈(chaos)을 상징하며 또 다른 신 ‘마르둑‘은 ‘티아맛‘과 싸워 그를 죽이고 그 시체로 하늘을 만든다Anchor Bible Dictionary(ABD)의 Tiamat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창세기에서 엘로힘이 물을 나누어(갈라) 궁창을 만들었다고 하는 구절은 아마도 바빌론 창조 설화를 창조에 대한 상식으로 이해하던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5-6(개역개정)

하지만 ABD는 창세기의 ‘테홈‘을 ‘티아맛‘과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아마도 ‘테홈‘이 ‘티아맛‘에서 빌려온 단어가 아니라 본래 ‘셈어’에 있던 말이며, 창세기에서 ‘테홈‘은 단지 물질에 지나지 않지만 에누마 엘리쉬에서의 ‘티아맛‘은 여신의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홈‘은 단순한 바다가 아니다. ‘테홈‘은 혼돈을 상징하는 ‘티아맛‘과 마찬가지로 창세기에서도 혼돈을 상징하는 물질로 등장했다. 2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엘로힘이 세상을 만들 때 ‘테홈‘이 존재했고, 그 상황은 혼돈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자 창공이 만들어 졌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현대인에게 빅뱅이야기와 비슷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라는 것이 혼돈에서 질서로의 변화, 혹은 혼돈을 통제하는 것을 의미했던 고대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문학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고대의 바빌론인들이 쓴 것이 에누마 엘리쉬이며, 이 신화는 그들의 신관, 인간관, 세계관 등을 반영하고 있다. 창세기는 이와 유사한 세계관을 가진 유대인들이 그들 나름의 신학적 관점으로 신과 인간과 세계를 묘사하며 이해하려고 한 문학이다.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