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웨인가 엘인가?

Excerpt

유일신관에 익숙한 현대인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면 ‘엘'(하나님으로 번역)과 ‘야웨'(여호와로 음역)을 동일한 신, 즉 이스라엘의 신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고대의 역사를 살펴 보면 두 이름은 처음부터 같은 신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EL ELYON, THE MOST HIGH

Pexels에서 Pixabay님의 사진에 글자를 더함

히브리어 ‘엘’은 일반명사로는 ‘‘이라는 뜻이다(조금 더 명확히는 divinity라는 뜻. 즉 포괄적 의미의 신성). 또한 엘은 잘 알려진 것처럼 이스라엘의 ‘신’을 지칭하는 명사로 빈번히 사용된다. 보다 일반적으로는 엘로힘이 쓰이긴 하지만 ‘엘’ 역시도 이스라엘의 ‘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엘로힘이 ‘하나님/하느님‘이라는 용어로 번역된 것처럼 ‘엘’도 ‘하나님’으로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혹은 그렇게 이해된다). 예컨대 창 33:20의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란 표현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이며, 엘과 엘로힘(‘엘로헤’는 엘로힘의 변형으로 다른 단어와 연결될 때의 형태)이 모두 등장했고 모두 ‘하나님’으로 이해/번역된다(*참고: 하나님과 하느님의 차이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이런 이유로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신’을 주로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신/하나님/엘/엘로힘의 공식 명칭은 야웨다(야웨가 여호와가 된 경위에 대하여는 여기를 보라). 이것이 구약성경이 밝히는 신의 공식 명칭이기 때문이다.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야웨)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출 3:15 (개역개정)

물론 (신/하나님)이 곧 야웨를 지칭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이 본래 야웨가 아닌 다른 신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면 어떨까?

한 번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의 종교는 실질적으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홍수 사건 이전의 엘로힘은 온 세상의 신이었지만 아브라함 이후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신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이름을 ‘야웨’로 계시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신’이었을 뿐이다. 다신사상이 주류였던 사회에서 자기의 ‘신’을 다른 신과 구분되는 다른 명칭이 없이 단지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아무튼 세월이 흘러 모세의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신이 바로 ‘야웨’였음이 밝혀 진다.

그런데 성경 외의 다른 근거들을 조사해 보면 엘의 정체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다음은 히브리어 사전이 보여 주는 ‘엘’의 의미이다.

el in HALOT
HALOT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흥미롭게도 ‘‘은 위 1번 옆에 나온 문구가 지시하는 것처럼 ‘야웨와 구분되는 의미‘를 갖는다(distinguished from Y(야웨의 약자)). 그리고 그 경우 ‘최고신'(supreme god)을 지칭할 수 있다. 야웨와 구분되는데 ‘최고신’이란 의미로 쓰인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의 용례로 위에 노란 색으로 표시한 ‘엘 엘욘‘을 들 수 있다. ‘엘’이 본래 신성을 광범위하게 이르는 표현이라서 이렇게 다른 어휘와 결합하여 사용될 때가 많다. 다른 예는 ‘엘 샤다이/샷다이‘(개역개정에서 ‘전능의 하나님)’가 있다.

개역개정에서 ‘높으신 하나님‘으로 번역한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을 높이는 표현이 아니라 ‘엘 엘욘‘이라는 신을 지칭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은 본래 가나안에서 ‘최고신‘으로 숭배되던 신이었다는 말이다(Prank M. Cross, el’, in TDOT I: 242-261). 믿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한다. 다른 예를 보자.

지극히 높으신 자(=엘욘)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신들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신 32:8-9 (개역개정)

위 본문(신 32:8)은 고대 사회의 다신 사상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문구로 흔히 거론되곤 하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엘욘‘(엘 엘욘과 동의어)께서, 즉 ‘최고신‘께서 하위 신들의 숫자대로 민족을 나누었는데 그중 야곱의 백성, 즉 이스라엘은 야웨에게 주었다는 의미의 진술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충격적이면서도 매우 흥미로운 진술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순전히 개인의 신비 체험을 기반으로 친족과 고향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했다. 그는 제도화된 종교를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를 선택하고 부른 신의 이름도 몰랐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그 신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가나안의 ‘최고신'(엘 혹은 엘 엘욘)의 명칭을 편의상 사용했을까? 아니면 가나안에서 자기를 부른 신이라고 여기고 가나안 신의 명칭을 사용했을까?

정확한 역사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때는 ‘엘’ ‘엘로힘’ ‘엘욘’ ‘엘 샤다이’ 등의 명칭이 각각 다른 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을 수 있고, 성경에는 그런 명칭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사용되었었던 적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명칭들은 후대에 제도화된 야웨 신앙에 통합되면서 모두 야웨를 지칭하는 하나의 별칭으로 간주되었을 지도 모른다

부록

위 사전에 대하여

위 이미지는 대표적인 히브리어 사전인 HALOT이 보여주는 ‘엘’의 의미다. 히브리어 사전은 엄밀히 말해 현대의 ‘사전’과 다르다. 사실상 ‘사어'(死語, dead language)인 성서 히브리어는 남아 있는 문서들에 사용된 용례와 유사 동족어(cognate language)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그 의미를 추정하는 방식으로 어휘 목록과 뜻을 밝힌다 그런 류의 사전을 보통 렉시콘(Lexicon)이라고 부른다. 위 이미지도 그런 연구 결과이며, 고대 사회에서 사용된 용례 연구를 통해 밝힌 ‘‘의 의미를 보여 주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라는 표현에 대하여

개역개정은 ‘신들의 수효대로’가 아닌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라고 해당 부분을 번역했다. 물론 임의로 말을 바꾼 것이 아니라 (레닌그라드 사본) 본문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니 개역개정은 본문에 충실한 번역이다. 다만 이 본문은 그렇게 읽으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구약성경 역본은 레닌그라드 사본을 바탕으로 번역되었다. 레닌그라드 사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 ‘완본’이다. 더 오래된 히브리어 본문도 있지만 모두 ‘완본’이 아니거나 아주 작은 단편들이어서 번역 성경의 원전으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번역할 때 레닌그라드 사본만을 활용하지는 않는다. 학자들은 레닌그라드 사본 뿐 아니라 매우 많은 다른 고대 사본들과 역본이 있어서 레닌그라드 사본의 단점을 보완한다.

위 신명기 32:8이 바로 그런 경우 중 하나이다. ‘엘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을 나누었다는 말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행히 이 부분에 다른 역본과 사본을 참고하면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사본을 참고하여 해당 부분을 수정하면 ‘엘욘께서 신들의 수효대로 민족을 나누었다’라는 뜻의 문장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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