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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히 기독교 경전은 신약과 구약으로 나눈다. 구약은 성서의 첫 번째 부분이며 사실상 성서 전체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신약은 새 언약, 구약은 옛 언약이라는 뜻이다. “이미 지나간 옛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구약”이라는 명칭이 “신약”이라는 명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구약을 중시하는 사람들 중 이 이름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제법 있고, 그런 이유로 “첫 언약”이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구약”이라는 명칭이 갖는 한계 혹은 이 명칭이 내포한 부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안을 굳이 만들어 사용해야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지않다. 아마도 그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기만 하다면 오랜동안 사용하여 익숙해진 “신약과 구약”이라는 명칭을 굳이 바꿀 필요까지는 없다는 의식이 아직까지는 보편적이기 때문인 듯 하다. 다시 말해서 “구약”이라는 명칭이 이 귀중한 문서들의 한 묶음으로서의 통칭으로서 비록 가장 적절한 표현은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그 부적절성이 이 어휘의 대안을 찾아 바꿔 불러야 할 만한 강렬한 동기는 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학자들도 아마 비슷한 심리를 가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성서학계의 마음을 움직여 “구약”의 대안으로 떠오른 명칭이 바로 “히브리어성서”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이 대안 명칭을 여전히 별로 사용하지 않는데 아마도 “구약”이라는 명칭은 두 음절밖에 되지 않는데 비해 “히브리어성서”라는 표현은 훨씬 길고 그만큼 부르기가 불편하기 때문인 듯 하다.) 아무튼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성서학자들로 하여금 이 익숙함을 포기해 가면서까지 Old Testament라는 이름 대신 Hebrew Bible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하도록 했을까?

2. 그 이유는 “히브리어성서”라는 말이 가진 의미에 있다기 보다 “구약성서”라는 말이 가진 이념성에 있다. “구약”은 “신약”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신약”은 그야말로 기독교의 경전이다. 즉, 기독교만의 책인 “신약”을 전제하는 표현인 “구약”이라는 표현은 이 큰 묶음의 책들이 당연히 기독교의 책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구약”은 본래 유대교의 경전이다.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구약”이라는 부르는 것은 기독교라는 거대한 제국이 이뤄낸 패권주의의 산물이다. 만일 기독교 패권주의가 처음부터 평화적이고 도덕적인 방식으로 그 권력을 인정받은 것이었다면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의 경전을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며 그 명칭을 “구약”으로 대체하여 부르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교가 세계사에 끼친 영향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3.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래 서구사회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폭력적 지배를 받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는 그 지배의 시작이 유대인들의 경전을 취하여 경전화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로마제국의 권력을 발판삼아 기독교는 세상의 가장 강력한 권력으로 올라섰고 결과적으로 본래 유대교 경전으로서 이 문서들은 이제 오롯이 기독교의 것으로 기억 될 수 밖에 없었다. 아울러서 기독교는 그들의 메시아 예수를 죽인 장본인으로 유대인들을 주목했고 그들에 대한 혐오를 키워나가며 동시에 하나님은 유대인을 버리고 그들의 자리에 기독교인을 앉혔다는 의식을 발전시켰다. 즉 유대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위치를 잃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할 권리마저 당연히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서구사회는 미대륙과 동양을 향한 침략전쟁과 약탈을 일삼고 이 모든 폭력을 그들의 경전으로 정당화 했다. 피해자들의 입장과는 달리 서구인들에게 혹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와 성서는 분명 그들의 삶에 어떤 긍정적인 작용을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세계사를 바라본다면 이 경전이 정당화하여만 씌여질 수 있었던 우리 인류의 역사는 적어도 지금 우리가 가진 도덕적 관념에 따르면 부도덕하고 반인륜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 성서학자들은 기독교의 이런 어두운 단면들을 누구 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다. 또 성서 연구의 큰 화두는 우리 시대를 위한 정의의 구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학자들에게 “구약”이란 이름은 폭력으로 얼룩진 기독교 패권주의를 지속하는데 편승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기독교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 특히 성서학자들에게 “구약”이란 얄궂은 이름을 대체할 만한 대안 그래서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히브리어성서”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 처럼 이 명칭은 의미적이라기 보다는 이념적으로 선택되었다. 의미적으로 이 이름이 “구약”이라는 이름보다 더 나아서가 아니다. 개신교에서 “구약”에 속하는 책은 대부분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긴 하지만 아람어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문자 그대로 이 책은 히브리어-아람어 성서인 것이다. 나아가서 가톨릭, 정교회, 또 그 밖에 다른 기독교 분파에서 정경으로 인정하는 많은 책들은 그리스어로 되어있다. 그렇게 본다면 히브리어-아람어-그리스어 성서인 것이다. 이런 의미적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어성서”라는 표현을 굳이 고집하는 것은 “구약”을 대체할 어떤 표현이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명칭을 바꿔 부르는 것 하나가 기독교 패권주의 역사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일종의 회개의 행위를 통해 우리는 용서를 구하려는 작은 시도를 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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