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야훼

For the English version, see this.

우리말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신은 ‘하나님/하느님’ (이하 하나님) 혹은 ‘여호와’라는 단어로 주로 표현되어 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신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 표현은 ‘야훼’라는 표현과 종종 혼용되어 쓰이기도 한다. 이 포스트는 이런 혼용이 생기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거주하던 기간 중 신의 현현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신께서 직접 계시하셨다고 전해지는 신의 이름이 소위 ‘여호와’이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모세가 만난 신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시며 15절에서는 “여호와”라고 지칭하신다. 즉 ‘스스로 있는 자’=’여호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14절의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의 원문은 ‘여호와’가 아닌 ‘에흐예’로 발음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는 에흐예니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14절에서 ‘에흐예’라는 표현을 쓰시고 그 다음 15절에서 ‘여호와’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14절의 ‘에흐예’와 15절의 ‘여호와’라는 표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에흐예’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을 가진 명사가 아니다. 이 단어는 동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어의 be동사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며 1인칭 남/녀성 단수의 형태를 하고 있다. (참고로 히브리어 동사는 인칭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주어가 따로 없어도 주어의 인칭, 성, 수를 알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히브리어 ‘에흐예’는 ‘I am’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단순한 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나는 ~이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에흐예’의 의미를 ‘존재하다’로 볼 경우 ‘나는 존재한다’로 볼 수도 있다. 우리말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은 ‘존재한다’는 의미를 의역한 것이다.

14절은 하나님께서 “나는 에흐예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히브리어 ‘에흐예’는 ‘나는 ~이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나는 에흐예이다”라는 말은 결국 ‘에흐예’를 두 번 말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에흐예’는 ‘나는 ~이다’라는 표현으로, 두 번째 ‘에흐예’는 이름을 표현하신 것으로 나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두 ‘에흐예’ 사이에 관계대명사 who가 들어가 있다. 즉 [에흐예 + 관계대명사 + 에흐예]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NRSV, NIV, NAB 등과 같은 대표적인 영어 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I AM WHO I AM”으로 번역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말이 되지 않는 표현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대표적인 유대인번역인 JPS (Tanak)의 경우는 번역을 피하고 음역만 하여 ‘Ehyeh-Ahser-Ehyeh’라고 이 부분을 번역을 하였다. 우리말 번역의 “스스로 있는자”라는 표현은 해석이 다소 가미된 의역이며 따라서 그 의미에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원문 자체가 이미 말이 되지 않는 표현인데 이를 말이 되게끔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은 ‘동사’의 형태로 이름을 표현하셨는데 이어 15절에서는 이 단어를 변형한 명사 형태의 말로 다시 한 번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신다. 그 이름이 바로 ‘야훼/여호와’이다. 3장 14절에서는 ʾHYH이었다면 3장 15절에서는 YHWH로 철자가 바뀌어 있다. 첫 자음과 세 번째 자음이 교체된 형태이다. 그런 이유에서 14절에서는 ‘스스로 있는 자’로 15절에서는 ‘여호와’로 번역이 바뀌게 된다.

이 두 어휘는 같은 어원(영어의 be동사)을 가지며 에흐예(ʾHYH)는 동사의 형태인 반면 YHWH는 품사적으로 명사로 여긴다. 하나님의 이름은 이후로 ʾHYH(에흐예)가 아닌 YHWH로만 나타난다. 그리고 성서학자들은 YHWH를 보통 ‘야훼’로 음역한다. 여호와가 아니라 야훼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와라는 발음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따라 신의 이름을 발음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성경에 YHWH라는 표현이 나올 때마다 ‘주님(Adonai)’이라고 바꾸어 불렀고, 이 네 개의 문자는 Tetragrammaton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명사문자(神名四文字)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발음을 하지 않는 이 어휘의 본래 발음은 결국 잊혀지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YHWH는 여호와도 야훼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정확한 발음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여호와’ 혹은 Jehovah라는 표현은 잘못된 음역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신명사문자를 발음하기를 꺼려했다. 아주 정확한 발음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나마 ‘야훼’라는 말이 비교적 나은 음역이다.

‘야훼’라는 발음이 어떻게 ‘여호와’라는 발음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히브리어를 알아야 하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러한 변형이 생겼는지는 히브리어에 대한 이해가 없이도 가능하다. 아래는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서 그 변형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홍길동’은 ‘두목님’이다. 홍길동을 따르는 자들은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추종자들은 홍길동의 업적을 기록할 때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자음’과 두목님이라는 단어의 ‘모음’을 섞어 표기했다. 즉 홍길동의 [ㅎㅇㄱㄹㄷㅇ]과 두목님의 [ㅜㅗ ㅣ]을 섞어서 [ ] 라고 표기했고, 그런 표현이 나오면 늘 ‘두목님’이라고 읽으라고 힌트를 준 것이다. 그러나 이 전통이 후에 와전되어 홍길동의 [ㅎㅇㄱㄹㄷㅇ]과 두목님의 [ㅜㅗ ㅣ]를 있는 그대로 조합하여 읽는 자들이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홍길동’의 이름은 ‘훙골딩’이 되었다.

홍길동이 훙골딩으로 둔갑하는 과정은 ‘야훼’가 ‘여호와’가 된 과정을 설명해 준다. 우리말이나 영어처럼 문자체계가 기본적으로 자음과 모음을 모두 표기하는 경우에는 이런 변형이 발생하기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처음 문자가 생성되고 발달했을 때 자음밖에 없었다. 우리로서는 상식적으로 왜 이런 불완전한 문자 체계를 가지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의 암기를 돕기 위해 고안 된 일종의 mnemonic device인 것 같다.

마소라 학자라고 일컫는 중세 유대인 학자들은 자음만으로 구성된 히브리어 경전의 정확한 내용을 모두가 오류 없이 읽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모음 기호를 고안하여 본래 주어진 자음에 조그마하게 달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룩하게 여겨지는 자신의 자음-경전의 외형을 되도록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작은 선과 점으로만 이 모음 기호를 개발했으며 주로 자음의 바로 아래에 조심스럽게 표기했다. 이때 야훼(YHWH)라는 신명사문자는 ‘주님’이라는 단어 Adonai의 모음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Jehovah 즉 여호와라는 말로 와전되었다. 참고로 Adonai의 모음(AOAI)을 YHWH와 결합하면 YaHoWaiH라고 해야 하겠지만 음역은 언제나 크고 작은 변형을 거치기에 Jehovah로 변하였다. 신성사문자의 첫 문자 Y는 독일어에서는 주로 J로 음역을 하는데 이것이 영어권에 그대로 전수되었고, 세 번째 문자 W는 독일어에서 V발음이 나는데 이 경우는 독일어의 발음이 영어권으로 전수가 되어 V로 바뀌었다. 모음의 경우는 그 변천사를 정확하게 밝히기 어렵다.

결론 + 사족 달기: 홍길동을 훙골딩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느낀다면 ‘야훼’를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은 우습다못해 황당스럽고 부끄럽기까지 한 일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 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달가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기독교인들에게 너무 익숙해진 이름인 나머지 이를 바로잡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신학교에서 히브리어 강의를 하면서 어떤 학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름 좀 틀리면 어때요. 하나님은 어차피 다 아실 텐데…” 아마도 이 학생의 가진 태도는 사실상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진 태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진 이런 태도에 대한 반성을 함께 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이름을 틀리게 부른다 하더라도 듣는 분께서는 누구를 부르는지 다 아신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류를 수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자신이 가진 종교의 신의 이름을 잘못 알고 있으나 그것을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금 더 근본적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왜 어려운 일인가?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정신적 메카니즘을 어려서부터 발달시킨다. 스스로의 언행을 합리화하기 위한 갖가지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다른 논리와 합리적 이유는 자신의 언행을 수정해야할 만큼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잘 회개하지 못한다.

내가 아는 어떤 젊은 부부에게 들은 말이다. 그들이 출석하는 교회에 어떤 분이 자기 아이의 이름을 계속 틀리게 부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번 아이의 이름을 제대로 알려 주고 정확하게 불러 주기를 요구했으나 여전히 틀린 이름으로 부르고 있고 전혀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그 부부가 그 사람에게 느끼는 짜증과 한심함을 공감한다. 그 감정은 단지 그 사람이 이름을 잘 못 외우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숙한 성인이 된 한 사람이 스스로의 잘못이나 오류를 돌아보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서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생활에 빠져있는 것에 대한 짜증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과 어떤 성숙한 수준의 교류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짜증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조금 극단적인 예시일 뿐 우리는 누구나 자기중심성의 덫에 걸려 나의 언행을 합리화하는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이 ‘덫’과 ‘틀’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상 행위를 수반한 진정한 회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매주 예배 때마다 드리는 예배에서 형식적으로 하는 회개 기도는 자신을 진정한 회개의 정신 상태로 전환시켜 주지 못한다. 나는 기독교 안의 회개의 희소성이 결국 기독교의 도덕성의 문제로, 심한 경우 범법성의 문제로까지 번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에서 지탄을 받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인들이 회개의 근본적인 정신을 갖추지 못한 채 자신의 언행을 합리화하기에 급급해 하는 데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호와와 야훼를 설명하다가 생각이 흘러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갑자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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