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라파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 이 글의 제목에는 ‘여호와’라는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본문에서는 ‘야훼’라고 표현하였다. ‘여호와’라는 신명의 문제에 대하여는 다음 글을 보라: 여호와, 야훼 Jehovah, Yahweh

* 이 글은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주관하여 킹덤북스에서 출판한 『재난 시대를 극복하는 한국교회』에 실린 저의 글을 상당량 간추리고 다시 쓴 것입니다.

1. 야훼 라파: 신앙 공동체에서 곡해된 의미

주의: 이 글은 ‘야훼 라파’라는 말이 오용되고 있음을 지적하려고 씁니다. 짐작하건대 한국 교회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 용어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정말 그런지 확인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 기독교에만 해당하는 글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 ‘야훼 라파’는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을 모든 질병과 아픔에서 건져주시고 고쳐주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야훼 라파’의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 않으며 당연히 그렇게 활용되어서는 안된다. 특별히 코로나 바이러스의 범유행(pandemic) 상황에서 이 용어는 심각하게 오용되고 있고 결국 기독교의 명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내가 이 글을 통해 이러한 오용의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야훼 라파’의 더 나은 이해를 누군가에게라도 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2. 야훼 라파: 어휘에 관하여

‘야훼 라파'(혹은 여호와 라파)는 그 자체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표현이 아니다. 이 표현은 출 15:26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고 하신 말씀에서 기원한 표현이다. 여기서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말은 정확히 말해서 “야훼 로프에카”이며 “야훼, 너의 치료자” 혹은 “야훼는 너를 치료하신다”라는 뜻이다. ‘야훼 라파’는 ‘야훼 로프에카’라는 표현에서 비롯되었고, 이를 변형시켜 쓰고 있는 용어이다.

위 그림(히브리어)에서처럼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따라서 ‘로프에카’는 왼쪽에 ‘야훼’는 오른쪽에 쓰여있다. 왼쪽, 네 개의 자음 문자(검정색) 중에서 첫 세 문자(ר פ א)가 ‘라파’라는 말의 어근이며, ‘치료하다’라는 뜻이고, 다른 한 문자는 대명접미사(대명사 역할을 하지만 단어의 끝에 붙는 접미사 형태로 존재)로 2인칭 남성 단수를 가르킨다. ‘로프에’는 남성 단수 분사형태로, 히브리어 분사는 영어의 the+형용사 같이 해석할 수 있어서 ‘~하는 사람’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종합해 보면, ‘야훼 라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나는 치료자이다’라고 선포하신 출애굽기 15장의 일화에 기원을 두고 만들어진 표현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왜 보호를 약속하셨을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거나 혹은 뭔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였을까?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뭔가를 잘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치유를 약속하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다. 바로 이것이 ‘치료의 하나님’이라는 구호를 아무 맥락도 없이 마구 외치기에 앞서 먼저 이 본문을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 이유이다.

3. 야훼 라파: 본문의 내용

이스라엘인들이 애굽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그들은 바다 앞에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그 바다는 흔히 ‘홍해’로 알려져 있다). 애굽의 군대는 이스라엘인들을 추격해 왔고, 이스라엘인들은 바다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물론 본문의 서사를 문서가설을 따라 자료(원천)로 구분해 보면 이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 않지만 대략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본문 서사에 따르면 하나님은 강한 동풍이 불어 오게 하셔서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셨고(혹은 더 유명한 이야기로 물이 갈라져 양쪽에 벽처럼 되었고)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인들을 이 위협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인들을 또 한 번 곤경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스라엘인들은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였고, 3일이 지나 물을 발견하였지만 실망스럽게도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물이었다. 이스라엘인들의 원망은 극에 달하였고, 모세는 야훼께 도움을 청하며 부르짖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문제도 기적적으로 해결하여 주셨다.

그리고는 서사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 이유는 아마도 편찬자가 하나 이상의 자료(원천)을 사용하여 이 서사를 완성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문서가설과 관계 없이, 즉 자료 구분 없이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읽어 보려고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본문이 서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문서 분석이 이 글의 주안점이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문서 구분을 하지는 않고 주어진 최종 문서 안에서 ‘야훼 라파’의 의미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만 언급하려고 한다.

본문의 ‘서술자'(narrator)는 야훼께서 물을 고쳐 주신 후에 이스라엘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말이 된다. 이스라엘인들은 바다에서의 큰 기적을 경험한 직후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평을 하였기 때문에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모종의 규율을 세워서 지키게 하실 필요가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아쉽게도 본문에서는 그 법도와 율례가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야훼께서 25절 하반절에서 ‘그들을 시험하셨다’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매끄럽지 못하다.

15:25b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5절 하반절과 26절은 이야기의 문맥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시험’은 물이 없이 광야에서 헤맸던 사건을 가르킬 수 없다. 법을 주신 사건은 ‘시험’보다 앞서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험을 하시려면 우선 법을 주셨어야 하는데, 법은 물을 고쳐주신 후에나 주어졌다(문서 분류상 그 법은 어쩌면 시내산에서 주신 법을 지칭할 수 도 있다). 다시 말해 이 본문에서 ‘시험’에 해당하는 사건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 본문에서 야훼께서 왜 ‘질병’과 하나님의 ‘신유 능력’을 언급하였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본문은 단지 이스라엘인들이 불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야훼의 덕분으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본문에서는 그 누구도 병으로 고통당하지 않았다.

만일 자료를 나누지 않고 본문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이 상황은 약간의 해석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 볼 수 있다.

야훼께서는 물을 고쳐 주셨지만, 그 모든 기적과 구원 뒤에 그들이 보인 불평에 관하여는 분명한 교훈을 주실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을 애굽에 불러 오셨던 질병으로 벌하셨고, 이윽고 그들을 다시 고치셨다. 그리고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 이스라엘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한다. 불평하지 말고 나를 신뢰하여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애굽에 불러 왔었고 또 오늘 너희에게 불러온 질병을 또 다시 불러 올 것이다. 만일 너희가 나를 신뢰하여 광야에서 불평하지 않고 모든 어려움을 견뎌낸다면 나는 결코 질병을 다시 불러 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너희를 고치며 모든 질병으로부터 너희를 구원하여 줄 것이다. 나는 야훼, 너희의 치료자이기 때문이다.!”

4. 야훼 라파: 조금 더 나은 이해

위에 제안한 읽기는 본문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사실 위에 상상한 것은 본문 그대로가 아니다. 사실 ‘야훼 라파’ 단락과 ‘법 수여’ 단락은 자료 구분을 따라 다른 곳으로 배치해야 할 수도 있다. 가령 열 가지 재앙 서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 내리신 모든 재앙과 질병으로부터 구원하신 이야기의 끝에 둘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시험’ 단락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또 고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본문을 이해하던지 본문에서 주님의 신유 능력을 경험하는 조건은 분명하다. 26절에서는 순종하고, 의를 행하고,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규례를 지키면 치료하시는 야훼께서 도움을 주시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주님 앞에 큰 죄를 지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뜬금없이 치료를 약속해 주시고 있는데, 비록 그 흐름이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그들이 지난 과오를 깨닫고 앞으로 계명을 잘 지키면 주님께서 그들의 치료자가 되어 주시겠다는 말로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야훼 라파는 낭만적인 야훼의 신유 능력, 어떤 경우와 상황에서라도 구하기만 하면 치유해 주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본문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한 야훼의 처벌 혹은 경고를 포함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죄’가 코로나 사태를 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금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고백에 대하여 칸트는 아마도 “이 바이러스의 출현과 누군가의 종교적 죄 사이의 인과관계는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사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사태가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다. 나는 칸트의 말을 충분히 공감하며, 부정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은 여전히 고무적인 일이다. 지금 이 재난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의 삶을 먼저 점검해 보는 것은 비록 ‘나의 죄와 재난’ 사이의 인과관계가 거의 없다고 할지라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자세가 이 본문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15장 26절은 주님의 치료의 은혜가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법을 따를 때 주어진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라도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기만 하면 고쳐주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출애굽기 15장에 따르면 누군가가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내세워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니며 서로 악수를 하는 등 기본 위생 수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그들을 고쳐주지 않으실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은 이미 많은 경우 집단 감염의 원인이 되었다. 물론 ‘법’적으로 그 사람들과 집담 감염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방역수칙을 무시하는 특정 종교 집단이 집회를 강행한 후로 갑자기 확진자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은 우연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수 많은 파생 문제를 일으켰고 대한민국 전체를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하였다. 특별히 이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는 경제적 고통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대한민국에 매우 심각한 피해를 끼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야훼 라파’의 약속이 야훼께서 ‘법도와 율례’를 주시며 이를 지키라고 말씀하신 후에 주신 약속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전제 조건이다. 그것이 선행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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