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 여호와 이레

(for English version click here)

1. 모리아는 어디인가?

대하 3:1에 따르면 모리아 땅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예루살렘이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개역개정)

그러나 역대기는 기원전 4세기경 페르시아 시대에 쓰여진 매우 늦은 시기의 문서로, 다윗 왕가와 남왕국 유다를 이상화하기 위하여 저작되었기 때문에 모리아와 예루살렘을 동일시하는 것 역시 그러한 의도가 있고, 따라서 대하 3:1 진술의 사실 여부에 의심의 여지가 있다.

신명기에서는 오직 한 장소에서만 예배하라고 명령한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초기 족장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지시를 듣고 예배를 드린 벧엘, 세겜 등의 여러 종교적 유적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지역들이 예배소로서의 정통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에 남왕국 유다는 별다른 종교적 유적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남쪽 땅에 정통성이 부족한 성전을 세웠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 유일한 장소가 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남왕국 유다를 옹호하려 했던 역대기의 저자는 유일한 예배의 장소가 예루살렘이라고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역대기의 저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모리아 땅이 사실은 예루살렘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별다른 종교사적 중요성이 없었던 예루살렘 성전에 벧엘이나 세겜을 능가하는 ‘고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곧 정통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은 여부스로 알려져 있다. 모리아가 아니다.

본래 예루살렘은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사사기에 소개되어 있으며, 지역명도 당연히 ‘여부스’였다. 여부스 지역은 다윗이 점령한 곳으로, 매우 뒤늦게 차지한 가나안의 한 지역이였고(삼하5), 솔로몬의 때까지도 여부스 사람들은 그 지역에 살고 있었다(왕상9:20).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다윗이 예루살렘에 궁전을 세우고 솔로몬이 중앙 집권화를 완수하기까지 그 어디에도 예루살렘의 본래 지역명이 ‘모리아’였다는 언급이 없다. 오직 대하 3장 1절에서만 그렇게 언급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본래 여부스였다. 심지어 대하 3:1에서도 여부스 사람 오르난을 언급하며 이 지역이 본래 여부스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나아가서 대하 3:1은 “모리아 땅”이 아니라 여부스 사람의 땅인 “모리아 산”이라고 축소하여 이야기한다.

비록 역대기의 진술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역대기 저자의 관점이 남왕국 유다를 옹호한다는 점과 역대기 외의 다른 어떤 성경 본문에도 모리아 땅이 예루살렘이었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모리아 땅과 예루살렘을 연결시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분명한 목적을 가진 언급이라는 의혹을 떨쳐버리기는 어렵다. 역대기 저자는 예루살렘 성전의 정통성을 옹호하기 위해 ‘언약’의 출발점에 서 있었던 아브라함을 선택하였다. 그가 제단을 쌓았다고 하는 미지의 ‘모리아’ 땅은 예루살렘 성전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최적지였다.

3. 모리아는 야훼 이레를 암시하려는 의도로 선택된 용어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다른 근거는 ‘모리아’라는 이름 자체에도 있다. ‘모리아’라는 말이 ‘야훼 이레’라는 표현에서 ‘이레’와 같은 어원을 가진 말이라는 점은 이 이야기가 ‘민담적’ 요소를 가진 창작품임을 강하게 시사한다(자세한 어휘 설명은 아래 4번 단락에서 다루겠다). 가령 ‘흥부’와 ‘놀부’는 그 이름부터 결국 흥할 자와 망할 자가 누구인지를 암시하는 동화적 이름이다. 견우(牽牛-소를 이끄는 자)와 직녀(織女-직물을 짜는 여자) 역시 ‘목동’과 ‘베를 잘 짜는 공주’라는 뜻으로 등장 인물의 특징을 보여주기 위한 문학 장치이며 그 자체로 이 이야기의 허구적 성격을 드러낸다. 구약성경의 ‘기룐’과 ‘말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약자'(frailty)와 ‘병약한 사람'(sickly person)을 의미하는데, 이 이름도 나오미가 그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리 없다. 단지 저자가 그들이 일찍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한 허구적 문학 장치이다. 어떤 이야기에 역사성을 갖는 이름이 아닌 목적성/의도성을 갖는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야기의 허구적 성격이나 민담으로서의 장르를 드러낸다. 창세기 22장 2절에서 신께서 나타시어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지시하신 ‘모리아’ 땅 역시도 구체적, 역사적 실제로서의 지역을 지칭하기 위한 단어가 아니라 ‘이레’라는 말이 결국 나타나게 되리라는 암시를 위하여 선택된 단어이며, 그러한 점에서 의도성을 가진 민담적 어휘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여호와와 야훼에 대한 어휘 설명은 이 블로그를 검색하여 보라)

4. 모리아, 이레, 두 단어의 어원

(1) 모리아: 모리아라는 이름이 흥미로운 점은 ‘이레’라는 어휘와 그 어원이 같다는 점이다. ‘모리아’의 어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어휘는 BHS(히브리어 원전 출판본,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본문에서 창 22:2의 ‘모리아’라는 어휘에 달린 각주를 보면 쉽게 파악이 가능하다(아래 그림에 해당 단어와 그 각주를 보기 쉽게 재현하였다. 윗단이 본문이며 아랫단이 각주이다). 그 각주에 따르면 다른 어떤 역본들에서는 이 어휘를 ‘마르에’라는 말로 인식하여 번역했다고 보여준다. ‘모리아,’ ‘마르에’ 매우 비슷하다. 그리고 ‘마르에,’와 ‘이레/이르에’도 매우 비슷하다(이레는 보다 정확히 음역하면 ‘이르에’이다). 모두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리아’의 어원은 ‘마르에’로 알 수 있는데, ‘마르에’와 ‘이레’가 같은 어원을 가지기 때문에 자연히 ‘모리아’도 ‘이레’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래 어휘 분석을 보라.

위에 노란 글씨로 쓴 부분이 잘 안보이는데, 해당 부분은 ‘관사’이며 영어의 ‘the’로 이해하면 됨; 윗단이 ‘모리아’이며 아랫단이 ‘마르에’인데 두 사이에 중복되는 정보는 기입하지 않음(가령 둘 모두 관사를 가지고 있음)

(1.1) 마르에:

‘모리아’의 어원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마르에’를 문법적으로 분석해 보자. ‘마르에’는 ‘라아'(ראה)라는 동사의 사역형(히필, hiphil) 분사이다. 우선 ‘마르에’는 ‘보다’의 사역형이므로 ‘보여주다’라는 의미이다(히브리어의 ‘보다’라는 단어는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므로 여기서 그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어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만 언급하였다). 히브리어의 분사는 다양한 의미를 갖는데 그냥 동사처럼 번역할 수도 있고 또 ‘~하는 사람/것’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마르에’는 ‘보여주는 것,’ ‘보여줌’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의미를 가지고 창 22:2을 다시 보면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보여주는 땅’으로 가서…”가 된다.

그렇다면 ‘모리아’는 무슨 뜻일까?(정확히 표현하자면 ‘모리야’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리아’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다. 다만 모리아의 어원이 ‘라아’이고 ‘라아’에 ‘ㅁ’ 이 첫머리에 접두사로 붙어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단어가 ‘마르에’ 같이 ‘사역형'(히필, hiphil)에서 파생된 명사라는 정도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모리아’는 ‘보여주다’와 관련된 파생명사로 볼 수 있다. ‘모리아 땅’이라는 말 ‘마르에 땅’과 의미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의미는 ‘보여주는 곳,’ ‘나타남의 땅’ 혹은 그와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2) 야훼 이레: 창 22:14의 ‘이레’라는 말은 좀 더 정확히 음역하자면 ‘이르에’이며, ‘모리아/마르에’와 마찬가지로 ‘라아’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르에’와 ‘라아’라는 말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금새 눈치 챌 수 있다. ‘이르에’에서 ‘이’를 빼면 ‘라아’와 더 비슷해진다(르에, 라아). ‘이르에’에서 첫 음절 ‘이’ 역시도 접두사로 미완료 3인칭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즉 ‘이르에’는 ‘그가 본다/그가 볼 것이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이 ‘야훼’를 주어로 하므로 ‘야훼 이레’는 ‘야훼께서 다 보고 계신다’라고 번역/해석이 가능하다. 흔히 ‘야훼 이레’라는 말은 주님께서 예비하신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의역이다. 물론 가능한 의역이긴 하지만 ‘보다’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본문의 맥락에서 이런 의미는 재고해 볼 여지가 있다.

창 22장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던 사건의 마지막에 아브라함은 본래 ‘모리아’라고 불리던 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고 바꾸어 부른다. 본래 ‘모리아’라는 이름은 이 문맥상 ‘주님이 보여 주시는 곳’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양’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곳은 주님이 ‘보여 주시는 곳’이 맞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경험하기까지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즉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어야만 한다. 특별히 주님께서 무슨 뜻이 있으신지 전혀 볼 수 없었다(히브리어의 ‘보다’는 말은 ‘알다’라는 의미로 매우 빈번히 쓰이는 말이다). 그는 정말로 이삭을 번제단 위에 올렸고 심지어 칼가지 치켜들었다. 이렇게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였을 때 하나님은 번제에 쓰일 양을 ‘보여’ 주셨고, 이삭은 목숨을 부지하게 되며, 아브라함은 드디어 주님의 큰 그림을 ‘보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주님은 다 보고 계셨구나!” 아브라함은 자신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을 걷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셨음을 느꼈고, ‘보여주심의 땅’을 ‘주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라는 뜻의 이름, 즉 ‘야훼 이레’라고 바꾸어 불렀다.

‘야훼 이레’는 이 글의 문맥에서 무슨 의미일까? 나는 ‘야훼 이레’가 매우 복잡한 심경이 담긴 발언인 만큼 이 글의 의도도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본다. 이 글은 욥기의 내용과 비슷하다.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마음 고생을 시켰는데, 처음부터 이삭이 죽게 하실 생각은 없으셨다. 단지 주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하셨다. 자기를 선택하신 신이 자기를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하시어 어둠 속을 걷게 하셨지만 정작 신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고, 그 결과까지도 보고 계셨다는 사실은 아브라함을 매우 두렵게하고 고통스럽게 하였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신께서는 아브라함을 속인 것이다. 신께 깜박 속아 넘어간 아브라함은 자기를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하신 동안 스스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셨던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야훼 이레’는 그런 상황적, 심리적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5. 이야기의 결론

만일 이야기의 결론이 ‘야훼 이레’라고 지역 이름을 바꾸어 부른 것으로 끝난다면 신앙인들은 이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짜 정점은 두 번째 신의 현현을 그리고 있는 22장 15절부터 19절에 있다. 이 단락에서 주님의 사자는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부르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6 [주님의 천사가]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친히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 너의 아들까지,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새번역

이 모든 일은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자손의 덕을 입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전제로 벌어진 일이다. 고대 저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큰 복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지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이 정도의 시험은 통과하여야 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결국 이 일화에서 주님께서는 온 세상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되는 세상까지도 보시고 있으시며, 그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의도적인 시련을 가하신 것이다. 이 일화에는 욥기에서처럼 아브라함이 후에 받게 되는 복을 위해서 이 정도의 시련은 정당화되는 듯 하며, 신이 주시는 시련은 결국 인간의 신앙적 성장과 그 성장에 따른 복을 위함이라는 ‘신관’을 보여 준다.

생각해 볼 점(1): 따라서 현대의 독자들은 몇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우선 우리의 낭만화 된 ‘신관,’ 즉 하나님은 매우 인간적으로 자비로우시며 선하신 분이라는 관념과 성경이 가진 ‘신관’은 잘 일치지하 않는다. 성경의 ‘신관’은 난폭하고 잔인한 면을 가지고 있다. 자기를 섬기는 자가 거의 희망을 잃을 때 쯤 아이를 주고, 다시 희망이 생겨나자 그 희망을 다시 끊어 버리는 시련을 준다. 그리고 그 시련을 바꾸어 다시 복을 주시는 기회로 삼는다.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신관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생각해 볼 점(2): 아브라함이 갖춘 ‘복 받을 조건’이라는 서사상의 요소는 ‘언약 신학’이 가진 ‘신의 전적 은혜’라는 측면을 약화시키는 면이 있다. 신명기 7:7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딱히 택함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선조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는 조건이 없으며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 그는 너무나 혹독한 시련을 견뎌내야 했고 그 시험을 통과한 결과 엄청난 복을 약속 받는다. 이는 고대인들에게 언약신학이 단지 약속의 무조건적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복잡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생각해 볼 점(3): 이 단락의 이야기는 허구적 성격을 갖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의 권위는 그 진술의 역사적 사실성에 있다. 이 단락이 애초에 허구적 문서라면 성경의 권위는 무엇에 근거하는가?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은 무엇인가?(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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