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성경 번역 이야기

사례 연구: 창세기 24:63


1. 개역한글 그리고 중국어, 영어 성경

한국 개신교에서 현재 공용으로 쓰고 있는 개역개정판 성경은 개역한글판을 개정한 것인데, 이 성경 번역의 뿌리는 무려 18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말 번역 성경은 처음에 각 권별로 나오기 시작했고, 후에 이를 편찬하여 <신약전서>와 <구약전서>가 1900년대 초에 완성되었다. 이 성경을 몇 차례 수정하여 1900년대 중반에 나온 성경이 바로 개역한글판 <성경전서>이다. 권별 성경만 가졌던 우리에게 성경 완본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식 명칭도 <성경전서>로 하였다. 또한 이 작업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이루어 낸 성과였다. 역경 속에서도 경전 편찬을 향한 열정이 결실을 맺은 것이기 때문에 감격스럽고 자랑스럽다.

하지만 이 성경은 아쉽게도 원어에서 직접 번역한 성경이 아니다. 처음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될 때 한반도에 원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전문가가 별로 없어서 기본 문서를 중국어 성경을 썼다. 이에 더하여 영어권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영어 성경도 참고했다. 원어 성경도 활용은 했지만 원문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지난 20세기 한국 기독교 신앙의 바탕이 된 개역한글판 <성경전서>도 원어를 번역한 성경이 아니라 ‘중역'(重譯) 성경이며, 해석이 어려운 구절들은 영어 성경의 해석을 주로 따른다. 자랑스러운 우리말 성경이지만 아쉬움이 있다.

2. 개역한글에서 개역개정으로현재

현재 한국 교회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판도 개역한글판의 계보를 잇기 때문에 ‘중역’ 성경이며 많은 경우 영어 성경의 해석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창 24:63의 경우 개역개정판은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삭이 묵상했다는 표현은 엄밀히 말하면 근거를 찾기 어렵다. 이 표현에 사용된 히브리어의 뜻을 알길이 없기 때문에 문맥상 의미를 파악해 봐야 하는데, 65절에 따르면 리브가가 멀리서 이삭을 발견했을 때 그는 들에서 배회하다가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 마중을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개역개정판에서 이삭이 묵상하고 있었다고 묘사한 것은 영어 성경(미국 선교사)의 영향이 크다.

그런데 조금 더 후대에 나온 영어 성경 중에는 이 부분을 이삭이 배회하고 있었던 것으로(walking) 묘사하기도 한다. 1966년에 나온 예루살렘 성경(Jerusalem Bible)과 Good News Bible(1976)이 그 예이다. 원어를 기반으로 1977년에 출판된 우리말 성경 ‘공동번역’은 예루살렘 성경의 영향을 받아 이 구절을 이삭이 ‘바람 쐬러 나왔다가’라고 번역을 하였다. 또 다른 원어 기반 우리말 번역 성경인 표준새번역(1993)은 Good News Bible의 영향을 받아 이삭이 ‘산책을 하려고 들로 나갔다가’라고 번역했다(물론 이 두 성경은 소개한 성경의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라 독일어 성경들을 포함한 다수의 다른 성경 번역의 영향도 받았다). 한국 기독교가 이미 다수의 원어 번역 성경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것은 이러한 성경들도 외국어, 특히 영어 성경의 해석 울타리 안에서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난제에 부딪힐 때 영어 성경을 참고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NRSV 등 중요 영어 역본들은 높은 수준의 성서학 성과들을 반영하고 있다. 성경 번역은 매우 까다로운 것이어서 대세를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 물론 더 나은 번역이 있을 수 있지만 세계 모든 사람이 쓰는 기독교 경전의 특성상 되도록 대세를 따르고 통일성과 질서를 추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번역은 하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다양한 번역이 생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기독교가 하나의 조직으로서 운영되기 위해서 성경을 되도록 통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중역 성경인 개역개정판은 분명한 한계를 갖지만 한국 개신교의 통일성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개역개정판 같은 중역 성경이든 원어에서 직접 번역한 <새번역>이든(표준새번역의 개정판) 난제 해결을 위해 영어 성경을 참고로 하는 것은 무조건 비판할 일이 아니다. 다만 내가 여전히 아쉬운 것은 우리의 학문적 역량으로 성경의 어려운 구절들을 풀어내어 독자적 해석을 싣고 이를 통해 기독교 경전을 발전시킬 수 있는 성경이 아직 우리에게 없다는 부분이다. 

3. 성경 출판의 어려움

나는 한국 성서학계의 원어 해석 및 번역 실력이나 다양한 학문적 연구 성과가 부족하여 우리의 독자적인 해석을 반영한 좋은 한글 번역 성경을 출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성경 해석이 성경 번역과 출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왜냐하면 현재 익숙하게 사용되는 성경의 ‘권위’가 새로운 번역 성경의 필요성을 억누루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중국어 성경을 기반으로 한 개역한글판과 그 계보를 잇는 개역개정판은 한국 개신교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본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원어 기반 번역인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공동번역 개정판과 새번역, 이 모든 훌륭한 번역 성경들은 개신교인들에게 거의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개역한글판으로 열심히 신앙 생활했던 기성 세대 성도들(지도자들 포함)은 새로운 번역을 받아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개역한글판을 주로 사용했던 세대의 신앙 생활은 성경 통독을 강조하고 암송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성경 번역이 바뀐다는 것은 자기가 고생하여 달달 외운 성경 구절들이 더이상 쓸모가 없어져 버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엄청난 변화였다. 그러니 이미 오래 전에 원어에서 직접 번역한 성경이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역한글판과 거의 흡사한 개역개정판 중역 성경만이 주로 사용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에 더하여 개역한글판의 계보에서 벗어난 우리말 번역 성경들이 한국 개신교에서 제대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이유는 그 성경들의 문체에도 있다. 한국 개신교의 예배는 고어체를 사용하는 문화가 있는데, 이 전통은 고어체를 사용하는 성경을 오래 사용한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개역한글판의 기원은 180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권별 번역 성경이 나오기 시작하여 1911년 마침내 첫 <성경전서>가 탄생했고, 이 성경을 몇 차례 개정하여 1952년, 개역한글판이 나왔다. 그래서 개역한글판은 1800년대 말의 어투를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고, 이를 수용한 한국 개신교인들은 여전히 고어체를 사용해야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다 보니 현대어로 번역한 다수의 원어 번역 성경들이 성도들에게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이고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그리고 <표준새번역>의 개정판인 <새번역> 등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 참고용으로만 쓰이게 되었고 개역한글판과 거의 흡사한 개역개정판만이 주요한 성경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4. 소회

성경 번역과 출판은 많은 시간과 재정을 요구하기 때문에 프로젝트를 시행하기 앞서 반드시 경제적 손익을 따져 봐야 한다. 오랜 시간과 비용을 들여 많은 연구자들이 공들여 번역한 좋은 성경이 나온다 하더라도 사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면 무용지물이며 경제적 손실도 크다. 이유로 새로운 성경의 필요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이유 때문에 쉽게 번역 사업을 실행할 수 없다.

번역에도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한국 개신교 상황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래서 예배에도 쓸 수 있는, 원어를 기반으로 한 번역 성경은 고어체를 사용하여 격조있고 엄숙한 느낌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의 일상적 어투를 쓰는 번역은 학문, 개인 묵상, 경건 훈련 등의 용도로 생각하고 번역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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