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학교로서의 연세대학교

* 이 포스트는 나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 학부 교양과목인 <기독교의 이해> 수업을 맡게 되어 준비한 내용을 사진을 곁들여 만든 것입니다.

책요약: <연세대학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박형우 지음. 서울: 공존, 2006

I. 연세대학교의 기원: 제중원(구리개, 지금의 을지로 2가)

1. 제중원은 1885년 4월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미국의 북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Allen)이 건의했고, 고종이 이를 받아들여 설립되었다. 제중원 건립은 미국 선교부의 입장에서는 선교사의 입국이 허락되지 않던 조선 땅에 외교적 방식으로 선교가 이루어질 수 있게 만들어 준 사건이며,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관계 때문에 서양의학 도입을 요청하기 곤란한 상태를 해결해 준 사건이었다.

1885년 광해원으로 시작하여 제중원이 된 건물

(1) 설립비화: 민씨 일가의 세도 정치(명성황후의 일족)로 근대화에 뒤쳐져 있던 조선을 개화하기 위해 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는데 이때 심하게 부상을 당한 민비의 친족 민영익의 치료를 알렌이 맡았다. 민영익이 알렌 덕에 생명을 구하고 완쾌되자 알렌은 왕실과 가까워 질 수 있었고 이를 기회 삼아 조선에 서양식 병원 건립을 건의하였다. 

(2) 언더우드(Horace Underwood)의 입국: 제중원 설립 후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는데, 당시 신분과 남녀의 차별이 분명한 관습에도 불구하고 거지와 나병 환자뿐 아니라 궁중의 양반들, 여성 환자도 많아 한국의 봉건적 관습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많은 환자를 관리하기 위해서 반드시 보조 인력이 필요했고, 제중원 개원 직전에 입국했던 언더우드 목사는 알렌을 도와 ‘조의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알렌
언더우드

(3) 진료비화: 당시는 여성이 남성 외국인에게 몸을 보여주며 진료를 받는 것이 매우 불편한 일이어서 높은 신분의 부인이 진료를 받으러 오면 병원 마당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에서 진료를 하게 했기 때문에 알렌은 ‘부녀과’설치를 서둘렀고 조선 정부의 지원으로 제중원 근처에 여병원을 새로 마련하였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이에 맞추어 여성 의료선교사 애니 엘러스를 파송하여 부녀과를 맡게 했다.

(4) 제중원의학교의 개교: 제중원 개원 후 진료가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알렌은 본래 목표였던 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하려고 하였는데, 종합대학 설립은 미국 공사(폴크)의 반대로 무산되고 의학교만 설립하게 되었다. 1886년 3월 29일 제중원의학교가 16명의 학생으로 개교를 했다. 이때 언더우드는 의학 교육에 필요한 기본 지식을 가르치는 예비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로 함께 재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현재 총 6년 과정 중 ‘본과’에 들어가기 전 2년 과정을 예과라고 하며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의예과’에 합격하여야 한다.)

II. 제중원, 세브란스로 발전하다.

1. 1893년 7월 미국 북장로회는 올리버 에비슨(Oliver Avison, 본인은 감리교인이었음)을 제중원에 보내어 진료와 교육을 맡게 했다. 1895년, 에비슨은 의료 환경을 개선시키고자 ‘진료소’와 ‘중앙병원’을 나누어 운영하며 진료를 효율화하였다. 같은 해 불행히도 한반도에 콜레라가 터지면서 방역에 집중하던 에비슨은 여러 교파가 협력하여 ‘연합병원’을 설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고 지속적인 노력으로 1904년 9월 3일 복숭아골(현재 중구 통일로)에 마침내 병원을 준공하였다. 이 병원은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기념병원’(severance Memorial Hospital)이라 하였으며 후에 ‘기념’을 빼고 세브란스 병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에비슨

2. 에비슨은 한국인 의료인을 효과적으로 배출하기 위하여 의학 교과서 번역 사업을 시작하여 거의 전 과목의 교과서를 편찬하였으며 세브란스 외 다른 선교 기관에도 무료로 배포하였다.

3. 한국인 의사의 첫 졸업식은 1908년 6월 3일(수) 오후 4시에 의학교에서 거행되었고, 학위는 의학박사였다. 이로써 에비슨의 의학 교육은 서양의학의 토착화를 이루었고, 정규 졸업생을 배출하는 체계를 갖추게 하는 공인 과정을 만들었으며, 졸업생들이 후학을 양성하게 하여 서양의학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자생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있다. 

4.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한 에비슨이 주도했던 이러한 성과는 타교단 선교사들과의 연합을 이루어 내어 후에 학교의 명칭을 세브란스 연합의학교(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로 변경하였다. 교단의 연합

이 이루어진 후 ‘의학교’는 ‘전문학교’로 승격되어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가 되었다. 당시는 을사조약 체결 후였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본인 교수를 함께 채용하였고, 이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승인을 얻어 내었다. 

III. 연희전문학교의 설립

1. 한국의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의 활동은 직접 포교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어서 의료와 교육을 통하여 거부감을 없애는 활동에 치중하였다. 그들은 기회가 되는 대로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거나 어린이들에게 초보적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하지만 서양식 교육 제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어린이들의 ‘초등’ 교육이 성과를 내기 시작하자 선교사들의 교육 활동은 점차 중등, 고등 교육으로, 또 대학교육으로 점점 발전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언더우드 고아원: 1885년 7월 언더우드는 자신의 집에서 몇 명의 소년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1886년 대리공사 폴크를 통해 조선 정부에 요청하여 고아원을 설립하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2) 남학교: 배재학당

(3) 여학교: 이화학당

(4) 여학교: 정신여학교

(5) 남학교: 경신학교

(6) 배재와 경신이 연합한 고등학교: 연합고등학교

2. 언더우드는 선교 활동 초기부터 대학 설립의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재정, 한국의 복잡한 상황,  파송한 미국 선교부의 사정 등의 이유로 번번이 대학 설립은 좌절되었다. 하지만 계속된 노력으로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감리회 선교사들이 협력하여 1914년 2월 ‘연합기독교대학’을 설립하고 정규교육을 시작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이마저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1915년 3월 5일 ‘한국기독교대학'(Korea Christian College)의 재단 이사회 구성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고 이날 조속히 대학을 섭립하기로 의결을 하였으며 임시 교장으로 언더우드를 선임하였다. 이렇게 하여 1915년 4월 한국기독교대학이 개교하였으며, 개교 직후 2차 재단이사회에서 학교의 명칭을 ‘조선기독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로 변경하였다.

건축 중인 조선기독교대학(지금의 스팀슨관)

(1) 당시 일본은 경성제국대학(지금은 서울대)을 설치하고 그 외 다른 종합대(university)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컬리지로 설립을 할 수밖에 없었다.

3. 개교 당시 건강이 좋지 않던 언더우드는 1916년 4월 미국에서 요양하던 중 사망하고, 언더우드 사망 후 1916년 12월 조선기독교대학 재단이사 및 교수연석회의가 개최되어 학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변경한다. 그리고 에비슨 박사를 신임 교장으로 지명하여 만장일치로 선임한다. 이로써 에비슨은 세브란스, 연희 두 학교 모두에 중요한 인물이 된다.

4. 연희전문학교는 1917년 4월 7일 교장 에비슨의 명의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재단 설립 인가를 받는다.

5. 1930년에 70세를 맞이하는 에비슨은 은퇴 전 연희와 세브란스의 합동을 지속적으로 모색하였으나(에비슨은 1934년 2월에 양교의 교장 직에서 물러났고 1956년 96세로 사망했다) 기존 졸업생의 소속감 문제, 양측 학교 중 하나의 학교에만 관련되어 있는 해외 선교부의 문제, 서로 다른 정관을 사용하고 있다는 문제, 서로 다른 이사회 구성원의 문제, 그 외 통합시 발생하는 다양한 현실적인 문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대학교’를 조선총독부가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문제 때문에 끝내 과업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두 학교간의 합동을 위한 노력은 계속 이어졌고 1933년 10월 양측 재단이사회의 합동회의 결과 ‘조선기독교대학교'(Chosen Christian University) 설립안이 나오게 되었다. 이 학교를 구성하는 대학은 다음과 같다.

(1) 문과대학 (2) 상과대학 (3) 이(수물)과대학 (4) 의과대학 (5) 그 외 다른 대학은 이사회의 판단으로 설치할 수 있다.

IV.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연희대학교의 출범

1. 에비슨이 1934년 한국을 떠난 후 오긍선과 원한경(호러스 언더우드의 한국식 이름)이 각각 세브란스와 연희의 교장이 되었다. 두 교장은 에비슨의 당부 대로 대학 설립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큰 후원자였던 존 세브란스와 존 언더우드가 잇달아 사망하고, 일제의 압박이 가중되며, 미국 선교부에서도 철수 의사를 밝히면서 대학 설립의 꿈은 멀어져 갔다. 

2. 일제는 세브란스에서 미국/영국의 색깔을 지우기 위해 학교 이름을 ‘아사히’(떠오르는 해, 일본 전범기를 상징하는 말)로 바꾸었고 일본인 교수를 대거 투입하였다.

3. 1941년, 일제는 원한경 교장을 사임시키고 친일파 윤치호를 연희의 새 교장으로 선임했으며, 외국인 재단 이사들을 제명했고, 1944년 급기야 연희를 폐교시켰다.

4. 1945년 해방 후 ‘아사히’로 강제 개명되었던 ‘세브란스’는 다시 이름을 되찾았고 같은 해 최동 교수가 새 교장으로 선임되어 1947년 예과 2년 본과 4년 학제의 대학으로 승격시켰다. 폐교되었던 ‘연희’도 복원되어 1946년 백낙준이 신임 교장으로 취임했고 같은 해 8월 15일 ‘연희대학교’로 승격시켰다. 백낙준은 연희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V. 연세합동의 시작

1. 해방 후 그동안 숙원 사업이었던 연희, 세브란스의 합동 논의가 재점화되었다. 한민국이 출범하던 1948년 본격적으로 합동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같은 세브란스와 연희 각 학교의 임시 교수회를 통해 대학 합동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양교의 본격적인 합동은 다시 지연되었다.

(1) 1946년 첫 합동 논의에는 ‘이화’의 길활란 총장이 함께 논의하였다. 1950년 합동 건에 대한 논의에서 김활란 총장은 협동은 환영하나 한국의 독립적인 여자대학을 유지하고 싶다는 의견을 표명한다.

2. 전쟁으로 인한 피난 중에도 합동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 1953년 4월 합동 원칙이 승인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교의 명칭에 대한 논의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는데 연희측에서는 ‘연희대학교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제안했고, 세브란스측은 ‘연희’를 포기하고 새로운 명칭을 사용할 것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3. 1953년 세브란스의 미 제8군 기념 흉곽병원 건설이 논의 되던 중 병원 위치를 연희와 이화 사이의 부지에 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고, 백낙준은 부지와 부지에서 나온 석재도 모두 무상으로 사용하라고 허락했다. 이 사안이 1954년 10월 공식적으로 논의되어 1955년 1월 이사회에서 수락되었다. 건축이 진행되는 과정 중 세브란스 병원의 부대 시설, 외래 진찰소 등을 추가로 건설하여 동양 최대의 종합 의료원을 건축하는 결정까지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연희와 세브란스의 합동이 가속화되었다. 

‘연희’와 ‘세브란스’를 합한 ‘연세’

4. 1956년 10월 9일 연희동문회의 임원회에서 합동 후 대학의 새 이름으로 ‘연세’를 건의했다. 동월 16일 합동이사회는 학교 이름을 ‘연세’로 하기로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1957년 1월 연세대학교의 서울지방법원에 등기를 완료하였고 3월 새로운 재단법인 연세대학교 이사회를 구성하고 백낙준을 초대 총장으로 선임했다. 

5. 연세대학교는 1957년 합동을 완료하여 지난 2016년 60주년을 맞이하였고, 2021년은 64주년이 된다.

VI. 기독교 학교로서의 연세대

1. 370~71쪽: “‘연세’는 미국 개신교가 한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앞세웠던 의료와 교육의 중심적인 양대 기관이 합동하여 탄생한 기관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기독교 전래의 역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교육기관인 셈이다…… 그러므로 연세는 한국 기독교 교육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기독교적 진리를 추구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야말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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