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이성종교

* 이 포스트는 연세대학교에서 내가 맡은 학부 교양과목인 <기독교의 이해> 수업에서 기독교의 윤리에 관한 내용을 가르치기 위해 준비한 내용을 사진을 곁들여 포스트한 것입니다. 윤리를 다루기 위한 글이라 실천이성비판을 주로 언급해야 하지만, 효과적인 내용 전달을 위해 불가피하게 순수이성비판을 먼저 다루었습니다. 판단력비판은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어 다루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세 번째 책만 제외시킨 꼴이 되었네요. 저는 칸트 전문가도 철학 전공자도 아닙니다. 얕은 지식이나마 학생들에게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작성한 포스트이니 너그러이 봐 주시기 바랍니다.

요약/참고/인용 논문 및 책

소병철, “칸트적 이성 종교 관점에서 본 한국 기독교 현실의 부정성,” <인문과학> 113 (2018. 8), 205-34
김승욱, “칸트와 신  존재증명,” <가톨릭신학과사상> 62(2008. 12), 178-224
박정하, “칸트 실천이성비판” <철학사상> 2003, 별책 2권 6호.

I. 칸트에 관하여

18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는 철학계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불릴 만큼 서양 철학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 그가 다루는 방대한 영역의 철학은 대표적 세 저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책들은 각각 이성, 윤리 실천, 그리고 인간의 미학에 관한 ‘평론/비판’을 다루고 있다.

이 책들에 공통으로 붙어 있는 ‘비판’이라는 표현은 흔히 말하는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나, 부정하거나, 혹은 흠집을 낸다는 의미가 아니다(그런 점이 없다는 것 또한 아니다). 칸트의 책에 쓰인 kritik(critique)는 분석하고 면밀히 조사하여 그것에 대하여 낱낱이 밝히는 행위로 ‘평론’ ‘논평’ 등의 표현이 더 적합하다. 예컨대 ‘순수이성비판’이라는 표현은 마치 순수이성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순수이성에 대한 평론에 가깝다. 칸트의 책의 한국어 번역서 제목은 이미 오랫동안 회자되어 왔고 본래 철학책은 의미 파악이 어려운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므로 굳이 바꿀 필요는 없어 보인다.

II. 순수이성비판

칸트 이전 서구 사회의 철학은 크게 두 줄기로 이어져 왔다. 하나는 합리론(rationalism)이며 다른 하나는 경험론(empricism)이다. 합리주의자들은 합리적 이성의 작용을 통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고, 경험론자들은 경험(감각)이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합리론자들은 형이상학적 지식을 구축했고, 경험론자들은 의학, 물리학 등의 지식을 구축했다. 합리론은 주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으며, 경험론은 감각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합리론과 경험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를 통합하여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논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이 경험에서 옴을 인정했다.  그리고 경험의 근거 없이 순수한 이론이성(사변이성)으로 도달한 결론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은 “이성의 월권”이라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칸트의 저서에 붙은 ‘비판’이라는 표현은 적절하다. 칸트는 인간이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실재를 중요시 했다. 그러나 칸트는 경험론자가 아니다. 경험론이 진리가 되려면 경험이 산출한 인식을 조직하는 수단/양식도 경험의 힘에 의해 얻어진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경험을 통한 인식은 그 자체로 이성의 작용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직관에 의해 수용된 정보들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고, 그것이 특정 ‘범주’속에서 ‘개념’화되어야 비로소 ‘인식’이 형성된다. 다시 말해서 경험이 아닌 순수한 인간 정신(직관, 감성)에 기초하여 경험이 지식으로 생산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성주의자이다. 다만 그는 이성적 사유가 경험론의 테두리에 있어야 함을 주장했던 것이고 사변적으로 도달한 결론을 실재화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직관,’ ‘범주,’ ‘개념’은 경험 인식의 선험/초월 요소이며 경험은 선험/초월 요소를 향하게 된다. 따라서 직관, 범주, 개념이 흔들리게 되면 경험은 보편타당한 진실에 이를 수 없다. 

이렇게 칸트의 철학은 이원화된 서구 철학의 경험론과 합리론을 통합하여 철학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의 중심이 지구가 아님을 주장하여 인식론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은 것처럼 칸트의 철학도 철학적 인식론에 그와 같은 수준의 공헌을 했다.

Flat Earth map drawn by Orlando Ferguson in 1893. The map contains several references to biblical passages as well as various jabs at the “Globe Theory”.

III. 존재론적 신(神) 증명(신존재증명)

칸트에 따르면 신의 존재는 ‘경험적’ 감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학은 사변(思辨)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변 신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칸트의 입장에서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신(神)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존재에 접근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칸트는 경험 감각을 근거로 하지 않는 순수한 합리적 추론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은 “이성의 월권”이다. 칸트에게 있어 존재 증명은 반드시 직/간접적인 경험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집트 피라미드의 존재는 직접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직접 경험이 어렵다면 간접 경험을 통해도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과 전혀 연결지을 수 없는, 전적으로 관념의 영역에만 있는 대상인 신 존재는 감각 경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직 사변 이성적 논의만 가능하다. 칸트에게 있어 사변적 신학은 신 존재의 가능성을 논할 수 있을 뿐 증명할 수는 없다. 칸트에 따르면 사변적으로만 주장된 것은 원칙적으로 존재 증명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존재론적 신 증명에 대한 칸트의 평론은 신 존재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변적 이성이 범하는 월권을 무효화함으로써 신 문제에 있어서 이성비판의 시험대를 거쳐 적절한 철학적 신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사전 준비단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칸트가 모색하고자 한 철학적 신학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그의 도덕적 신 존재 증명이다. 여기서 칸트는 도덕적 주체성 안에서 신학(신에 대한 사고)과 도덕(도덕법칙)의 결합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신학을 모색하고 있다”(김승욱, “칸트와 신  존재증명” <가톨릭신학과사상> 62호, (2008. 12), 178-224).

IV. 실천이성비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철학에 근거한 사유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인간은 ‘신존재증명불가’ 사상을 통해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경험에 근거한 이성적 사유로 발견한 진리는 신의 객관적 실재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에 사유 주체에게 그에 걸맞는 도덕적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그런데 본래 인간은 간사한 존재여서 행복을 얻으려는 일종의 욕심의 지배를 받아 행동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면 인간은 방종할 수 있게 되고, 이 행위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자멸로도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진리가 자멸로 이어진다는 문제 혹은 모순과 대면하게 된다.

(참고: 인간의 도덕성의 원천이 오로지 신의 절대적 요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신론이 실제로 방종과 자멸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 인간은 생존과 번영을 위하여 필요한 사회적 행위를 지속할 것이고, 이러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도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입장에서 생존이나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도덕 행위’는 순수한 의미에서 도덕 행위는 아니다. 칸트의 도덕은 스스로 입법자가 되어 도덕 법칙에 복종하는 의지이지 보상이나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아가 칸트의 주장은 사변 이성이 도덕적 토대가 된다면 의지와 관련이 없고 오직 인식과 관련이 있는 사변 이성으로는 실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한다.)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보완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순수 이성이 월권을 범하는 것”을 비판하여 감각되는 경험에 근거한 인식을 부각시켰다면, <실천이성비판>에서 그는 “경험에 의해 조건지어진 이성을 통해 규정되는 의지가 마치…… 도덕의 토대 역할을 담당하려는 것”도 비판한다. 사변이성의 관심은 객관의 인식에 있고 실천이성의 관심은 의지에 있다. 인식과 의지는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 즉 진리는 순수이성으로만이 아니라 실천이성으로도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박정하, “칸트 실천이성비판” <철학사상> 2003, 별책 2권 6호).

V. 도덕 법칙/정언명령

칸트에게 도덕 법칙의 원천은 “인간의 이성 자체이다. 인간은 한 편으로는 자연적 존재자 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예지적 힘, 즉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힘을 통해 자신을 넘어서서 당위의 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데, 여기서 도덕 법칙이 나온다. 그래서 도덕 법칙의 원천은 바로 인간의 이성이다…… 도덕 법칙은 인간 이성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이므로 타율이 아니라 자율이다…… 도덕 법칙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도덕 법칙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과하고,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그것에 스스로 복종해야만 하는 법칙이며, 인간이 악으로 나갈 수도 있는 자연적 경향성을 제압하고 스스로를 도덕 법칙 아래에 세워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만 인격적 존재자가 될 수 있기 때 문이다”(박정하, 30). 따라서 칸트에게 있어 이성적 인간은 도덕적 인간이며 도덕적 인간은 이성적 인간이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 법칙은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는다. 보편적 법칙은 언제 누구나에게 타당해야 하며 필연적 법칙은 무조건 타당해야 한다(박정하, 37). 이성적/도덕적 인간이 정언명령을 실천하기 위해 따라야 할 기본 법칙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백종현 역

칸트의 이성종교

이성적/도덕적 행위는 ‘덕'(예지계-이성 작용으로 현상계를 초월하여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덕’은 ‘행복'(감성계)을 보증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고선’은 덕과 행복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덕은 행복을 수반하지 않으며, 행복은 덕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따라서 ‘최고선’은 성취할 수 없는 불가능한 개념이 되어 도덕 법칙을 거짓되게 만든다. 예지계와 감성계에는 어떤 관계도 없으므로 도덕 법칙을 따르는 이성적 행위자는 스스로의 도덕성과 행복을 일치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천이성의 과제는 최고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덕과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신의 현존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요청’(postulate)이란 증명하지 않고도 보편적으로 혹은 너무도 자명하여 단순히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존재론적 신 증명이 불가함을 통해 사라졌던 신은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이렇게 되살아 나게 된다.

참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객관적 실재를 감각되는 경험의 테두리 속에 넣었다. 그러나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사변적 개념으로만 논할 수 있는 ‘신’에게 객관적 실재를 부여한다. 학자들은 이를 모순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를 모순으로 보지 않는 칸트 해석가들도 있다: 칸트는 경험적 인식이 이성의 작용이기 때문에 이성은 원인성을 갖는다. 그래서 이성은 경험적 직관을 끌어낼 수 없음에도 선험/초월적으로 실재성이 정당화된다. 마찬가지로 도덕 법칙에 있어 자유 의지는 원인성을 갖는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 자유 의지는 직관을 끌어낼 수 없어도 실재성이 정당화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신’의 객관적 실재성은 정당화 될 수 있다(박정하, 23, 60).

그런데 도덕 법칙은 이성적 존재 누구에게라도 적용되어야 하며 따라서 신조차도 따라야 할 법칙이다. 칸트에게는 신적인 것이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인 신적인 것이다(소병철, 215). 바로 이 지점에서 칸트의 ‘이성종교’ 개념이 나타난다.

칸트의 이성종교 관점에서 본 한국 기독교(소병철)

“칸트의 종교 철학은 도덕을 종교에, 이성을 신앙에 복속시키려는 일체의 기도에 맞서 후자를 전자의 보완물로 엄격히 규정하려는 기조 위에서 전개된다”(208). “신에 대한 인식이 도덕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 법칙이 신에 대한 신앙을 정당화 할 수 있다”(206). “칸트의 신은…… 도덕신”이다(207). 실천이성을 따라 도덕 법칙을 실현하는 것이 곧 신앙이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칸트의 도덕 법칙은 그 원천이 인간의 이성이며 타율이 아니라 자율이고 인간의 본질이며 스스로 복종해야 할 법칙이다. 이성종교의 관점에서 도덕적 행위는 어떤 이득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며 이성을 따르는 의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신앙/도덕 행위는 아무 조건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칸트는 신앙의 목적을 ‘나’에서 ‘선’ 그 자체로 변화시킨다. 신앙의 목적은 인과응보적 복락이나 은총을 덧입기 위함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 자체에 있다.

그러나 “제멋대로 명령하는 신”은 “절대적 상벌의 권력을 보유한 무도덕적 입법자”가 된다(214). 따라서 그러한 신의 명을 받드는 것은 “권력에 빌붙어 안위를 챙기는 ‘무도덕적’ 신민”이 된다(214). “은혜를 구하는 제사 종교는 신자로 하여금 보다 선한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기도만 잘 하면 자비로운 신의 은사로 영원한 행복을 하사받을 수 있다고 믿게 한다”(215)(참고: 따라서 현실 세계에서 얻은 행운은 신의 은사로 인식되어 자신의 실제 행실의 도덕성과 관계 없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게 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즉 현실에 벌어지는 불행들은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였다 하더라도 신에게 은혜를 받지 못한 표식이 되어 불필요한 죄책감을 갖게 된다. 이런 경로로 신도들은 도덕 행위에 무감각해 진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 기복신앙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안타깝게도 “기복과 사제의 제사 의식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비이성적 탈선을 주도하는 표준적 주술 요소로 교계에 안착된 듯하다. 그러나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정확히 환기하듯 신에게 복을 비는 것은 ‘지극히 부당하게도 단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자신을 편애해 달라고 신에게 떼를 쓰는 것’이다.”(220).

“단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의 윤리적 문제

“칸트가 실천 이성의 요청으로 상정한 신이란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지원할 최상의 도덕적 입법자, 즉 도덕신에 다름아니며, 따라서 신에 대한 섬김인 종교도 감성적 인간의 기복적 의도에 부응하는 제사 종교, 즉 ‘은혜를 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이성적 신의 입법적 선의지에 부응하는 도덕 종교, 즉 ‘선한 품행의 종교’로 구현될 때에만 섬김의 진정성과 함께 이성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 칸트의 결론이었다.여기에 덧붙여 논자는 한국 교회의 주류 세력이 인류의 영적 스승인 예수를 ‘천국행 브로커’로 고용해 돈 버는 데에만 혈안인 현실을 지적한 후 전술한 칸트의 관점이 도덕적 섬김과 광신적 배덕을 가름할 ‘도덕적 여과기’로서 그러한 병폐의 진단과 수술에 긴요한 입각점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2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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