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기독교적 리뷰

No Country for Old Men, a Christian review (for English version click here)

1.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vs.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혹은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의 제목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라는 시의 첫 문구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제목인 듯하다. 이 시에서 화자는 ‘노인’이다. 그는 젋은 세대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육신의 욕망에만 사로잡혀 있고 고상한 가치 따위에는 무관심하다고 지적하며 이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한탄한다. 따라서 영화의 제목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기 보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 제목과 내용의 연관성

이 영화는 한 잔혹한 살인마와 그에게 쫓기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스릴러 장르이지만 제목은 마치 노인 복지에 관련된 휴머니즘적 철학을 표방하고 있는 듯한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도대체 이 제목이 영화의 장르나 내용과 어떻게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영화를 다 감상한 후 리뷰를 찾아 보니 아니나 다를까 관객들은 영화의 제목과 관련된 많은 의문점을 표출했고, 또 많은 리뷰들이 이와 관련되어 작성된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감독은 분명히 제목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정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의미를 제목에 비추어 깊이 파고들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숨겨 놓은 메시지를 찾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3. 숨겨 놓은 메시지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목’이라고 본다. 제목을 해석하기 위해 이 영화를 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노인’의 어떤 존재인지, 그 노인이 살아가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그리고 영화 속의 세계는 왜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닌지를 발견해야 한다. 이를 발견하기 위해서 관객은 감독이 ‘상징’으로 활용한 영화 속 요소들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상징은 하나의 의미로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양한 해석을 자아내게 된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관점으로 상징을 해석해 보려고 했다. 내게 중요하게 여겨진 부분은 이 영화의 제목이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의 첫 문구를 따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영화 속 상징의 의미를 찾는 기준이 1차적으로 예이츠의 시에 있다고 생각했다.

3.1.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예이츠의 시 제목은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이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틴)는 로마 황제 중 최초로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그는 기독교 박해를 공식적으로 종결하고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는 그곳 이름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바꾸었다. 이 시기를 비잔틴 제국 시대라고 부른다.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한 소위 기독교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예이츠의 시는 난해하고 모호하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보기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시에서 ‘노인’은 ‘비잔티움’으로 갔으며, 비잔티움은 기독교 정신이나 사상을 대변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는 ‘현 세대’가 육신적 욕망에 매몰되어 있는 것에 비판적이며 비잔티움을 찾아 가는 ‘노인’은 그런 존재들과 대조되는 사람들을 은유적으로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비잔티움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사상’ 혹은 ‘기독교 시대’는 육신적 욕망에 매몰된 세상과 현 세대에 반대되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된다. 물론 비잔티움은 육신적 세상보다 더 나은 어떤 세상이라는 은유적 장치이지 반드시 기독교적 세계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적 새 시대를 상징하는 비잔티움을 ‘어떤 더 나은 세상’의 은유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시는 기독교와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시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규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 이런 기독교 색채가 강한 시의 첫 문구,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를 영화 제목으로 정했다는 것은 영화에 숨겨 놓은 메시지도 기독교와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리뷰도 쓰게 되었고, 제목도 ‘기독교적 리뷰’로 하였다.

4. 영화의 기독교적/신학적 요소들

4.1. 텍사스

AnonMoos based on image by Darwinek, CC BY-SA 3.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이 영화는 텍사스를 배경으로 한다. 나는 유학 시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텍사스의 포트워스(Fort Worth)와 달라스(Dallas)에서 지냈고, 내가 다니던 교회는 플래노(Plano)에 있었다. 영화의 초반에 보안관이 서술(narration)하는 장면에서 자기 아버지는 플래노의 보안관이었다고 언급하는 것을 듣고 매우 반가웠다.ㅎㅎ

텍사스는 공화당 출신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 대통령을 배출한 지역으로 전통적으로 공화당의 표밭이며, 미국 사회에서 소위 ‘보수’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요소들, 예컨대 총기 소지 자율화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다. 당연히 이 영화에서도 총기를 자유롭게 소지하고 사용하는 텍사스 주민들이 다수 등장하며 ‘기독교인’ 보안관도 등장한다. 추가로 강한 억양이 섞인 텍사스 말투를 쓰는 등장 인물들은 “이 영화는 텍사스를 배경으로 하는구나!”라는 인상을 지속적으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미국의 정치 지형과 보수 기독교인과의 상관성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텍사스의 특징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서 나오는 ‘가벼운 대화들’이 얼마나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지, 그리고 ‘텍사스다운지’ 실감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기독교 관련 메시지를 숨겨 두기 위해 감독이나 소설가가 배경을 텍사스로 한 것은 상당히 영리한 판단이었다.

4.2. 노인을 위한 나라, 총을 멀리한 옛날 보안관들

넷플릭스 화면 캡처

첫 도입부에서 주인공 보안관 에드 톰 벨은 옛날 보안관들이 총을 쓸 일이 별로 없을 정도로 세상이 평안했고 제대로 잘 돌아갔다고 말하면서 지금은 딱히 동기도 없이 사람을 죽일 정도로 세상이 악해 졌다고 꼬집는다. 기독교인들이 종종 말하는 것처럼 ‘말세’가 된 것이다. 이 영화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보안관이 총을 쓸 일이 없는 평안한 나라이다. 이런 나라는 기독교적 인과응보가 살아 있는 나라이다. 하지만 1980년의 텍사스는 더 이상 그런 나라가 아니다 .영화의 주요 사건의 핵심 인물인 르웰린 모스가 살인마 안톤 쉬거에 의해 살해당한 후 에드 톰은 동료 보안관과 커피숍에 앉아 변해버린 ‘악한 세상’에 대해 또 꼬집어 말한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돈과 마약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료 보안관은 요즘 텍사스의 젊은이들이 초록색으로 머리카락을 물들이고 코를 뚫는 등 행색이 단정치 못한 것까지 지적하며 ‘세상 말세’임을 한탄한다. 이에 에드는 ‘signs and wonders'(표적과 이적)라고 응수하며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맞장구 친다. 에드 톰은 세상을 성경적으로 바라보며 현재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을 signs과 wonders로 알아채고 ‘말세’의 징조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나이 든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흔히 하는 대화이며,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세상이 너무 흉흉해 지고 있다는 한탄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사실 ‘기독교 꼰대들’의 대화인 샘이다.

4.3. 에드 톰 벨, 노인, 보수적 기독교인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에드 톰은 현재의 상황을 개탄하며 과거를 그리워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다. 그는 총을 쓸 일이 별로 없는 평안한 나라, ‘노인’을 위한 나라를 그리워한다. 이런 나라는 기독교적 인과응보가 살아있는 나라다. 하지만 과거에 과연 그런 나라가 존재 했을까? 아니다. 세상은 변한 것이 없다. 단지 에드 톰이 과거를 그렇게 여겼을 뿐이며 지금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과거와 달라졌다고 느낄 뿐이다. 르웰린 모스가 죽고 영화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에드 톰은 그의 지인 앨리스를 찾아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거기서 앨리스는 자기가 이 미처 돌아가는 세상에서 보안관을 계속하는 것이 힘들어 그만두려고 한다고 하소연한다. 그러자 앨리스는 “what you got ain’t nothing new”라고 말하며 1909년에 죽은 에드 톰의 삼촌 맥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맥도 최근 자기가 겪은 말세적 살인 사건과 유사한 수준으로 참혹하게 살해 당했다는 것이다. 앨리스는 과거 세상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려 준다. 여기서 에드 톰은 자기가 ‘노인을 위한 나라’로 생각했던 과거가 사실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는 듯하다. 그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이에 더하여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신이 자기를 지켜 줄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회의가 오래 동안 자라나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더이상 그런 믿음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가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저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신의 보호를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여기며 신의 정당상을 옹호한다.

관객들은 에드 톰의 다양한 경험을 접하며 결국 과거에도 지금도 신은 누구도 지켜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게 된다. 사실 에드 톰이 옛날을 회상하며 “그때가 좋았지”라고 한탄하고 있지만 이 영화의 배경은 이미 오래 전인 1980년이다. 영화가 제작된 시기가 2007년이니 27년 전의 노인이 옛날이 좋았다고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옛날이 좋았지’라며 한탄하는 것은 1980년에도 있었고 2007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계속 있을 것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결국 세상은 항상 똑같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노인’을 상징하는 인물은 에드 톰이다. 그의 1980년 텍사스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비잔티움으로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과거도 결국 그를 위한 나라는 아니었다.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죽어서 들어갈 천국뿐이다. 이렇게 은유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에드 톰으로 대표되는 (나이 많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기독교적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이다.

4.4. 안톤 쉬거, 고스트, 죽음의 신

넷플릭스 화면 캡처

겉 보기에 조금 모자라 보일 정도로 순해 보이는 안톤 쉬거는 사이코 패스이자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이다. 그가 나오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잔혹한 살인이 일어난다. 그야말로 죽음의 화신이다. 커피숍에서 동료 보안관이 안톤 쉬거를 가르켜 미치광이라고 이야기하자 에드 톰은 쉬거가 그 이상인 것처럼 느껴진다며 그를 ‘ghost’라고 묘사한다. 나는 이 부분이 안톤 쉬거에 대해서 감독이 숨겨 놓은 상징적 의미라고 보았다. 그는 ‘죽음의 유령’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죽음’은 마치 미치광이 사이코 패스처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목숨을 앗아 간다. ‘쉬거’같은 죽음의 유령은 아이만 남겨 둔 채 어미를 암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소년 소녀 가장들이 그들의 동생들을 다 키워 놓기도 전에 사고로 죽여버리기도 한다. 하나님의 정의, 혹은 기독교적 인과응보 사상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죽음의 신’ 쉬거는 에드 톰으로 하여금 현 시대가 말세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엉클 맥의 죽음이 시사하는 것처럼 죽음은 원래부터 무차별적으로 누구에게나 무섭게 찾아 왔었다. 죽음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있을 것 같은 쉬거 같은 존재인 것이다. 기독교적 인과응보 사상은 쉬거, 즉 죽음 앞에서 무력해만 보인다. 영화에서 쉬거는 언제나 승리하기 때문이다.

5.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

영화가 상징성이 강하다 보니 의미도 명확하지는 않다. 나는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려 한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노인’의 역할을 맡은 사람은 에드 톰이기 때문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라가 아니다’라는 제목은 ‘에드 같은 사람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나라는 없다’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표현을 더 구체화해 보면 ‘세상은 에드가 생각했던 그런 세상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은 정의로운 신이 엄격히 다스리는 것 같지 않고 신의 인과응보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은 마치 사이코 패스 미치광이 살인마처럼 아무데서나 사람을 마구 죽이고, 사람들은 무방비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고 세상이다. 에드 톰은 영화의 줄거리가 전개되는 동안 바로 그 부분을 자각하게 되는듯 했다. 인과응보적, 기독교적 필터를 벗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암시를 준다는 말이다. 그러나 확실히 그렇지는 않다. 결국 그는 ‘노인’일 뿐이고 그의 오랜 관념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심리는 모호하기만 하다.

나는 이 영화가 신이 인과응보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며 정의롭게 통치한다는 막연한 기독교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소위 ‘인과응보 사상’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이해를 비판하는 것이지 기독교 신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구약학자로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인과응보 사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소 단순하고 과격한 수준의 인과응보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자면 ‘인과응보’의 신학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성경의 저자들은 세상이 기계적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라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이 문제를 가지고 치열하게 씨름했고 그들의 고민의 흔적을 꽤 많은 곳에 남겨 두었다. 그 이야기들을 여기서 다 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 말하자면 잠 27:1을 들 수 있다. 이 격언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라고 조언한다. 만일 신의 인과응보가 철저히 이루어진다면 ‘내일 일’을 자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신의 뜻을 따르며 의롭고 지혜롭게 사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인과응보적 질서가 반드시 지켜진다면 ‘내일’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고대의 현자는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예들을 성경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복잡하고 심오한 이야기들을 사실상 간과하는 경향이 있으며, 세상만사를 주로 ‘인과응보’라는 단순한 사상으로 모두 설명하려 한다. 에드 톰은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을 대표한다. 하지만 에드 톰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적’인 사람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기독교 신앙의 문제점을 꼬집고 더 나은 신학으로 더 바르게 신앙을 세워 나가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세상은 단순화된 현재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설명되지 않는 곳이라는 메시지와 기독교 경전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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