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부제: 야곱은 신과 싸워 이겼나?

야곱이 라반의 집을 떠나 귀향하던 중 얍복 나루에 이르렀다. 그는 에서가 복수심에 가득찬 마음으로 자기를 맞이하러 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다. 야곱은 자기와 함께 하던 무리를 세 떼로 나누어 자기보다 앞서 보내고 그들이 에서를 만나면 그에게 예물을 먼저 주게 하였다. 에서가 선물을 받고 노여움을 조금이라도 푼 후에 만나면 에서가 자기를 용서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소유를 앞서 보낸 후, 밤 늦게야 얍복 나루를 건너려 했던 야곱은 네 명의 아내, 열 한 명의 아들들마저도 먼저 보내며 결국 본인은 혼자 남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유명한 사건이 벌어진다. 어디서 왔는지, 정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야곱 앞에 나타났고, 야곱은 그를 붙잡고 늘어지며 자기를 축복하지 않으면 절대 보내드릴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

* 이야기의 후미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이 낯선 남자는 ‘엘’, 즉 신이다. 물론 ‘신의 사자’라 여길 수도 있으나 창 32:30에 따르면 야곱은 자기가 만난 분을 ‘엘’이라고 이해했고, 그래서 그곳 이름을 ‘엘의 얼굴’ 혹은 ‘엘을 대면함’을 뜻하는 ‘브니엘’이라고 지었다.

야곱에게 붙들린 그 낯선 남자의 반응을 개역한글 성경은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32:25). 이 낯선 사람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한 번 가격하여 이탈시킬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센 사람이었다. 그는 야곱과 싸워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본문 번역은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라고 했으니 어딘가 이상하다.

사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이기다’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가능하다'(יכל, 야콜)라는 단어를 쓰고 있을 뿐이다(영어의 to be able). 일반적으로 이 어휘는 ‘to+부정사’가 뒤이어 나오면서 무엇이 가능한지 혹은 가능하지 않은지를 밝혀 준다. 예를 들어 ‘he was able to win’과 같이 ‘to win’이 ‘야콜’에 이어 나와야 정학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본문에는 ‘to win’ 혹은 그와 비슷한 문구가 없다. 그래서 이 본문을 직역하면 ‘he was not able (him)’이 된다. 문장 성분이 다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용례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히브리어 사전은 ‘야콜’이 ‘to+부정사’가 없이 인칭대명사를 목적어로 직접 가질 때 prevail(능가하다), overcome(극복하다), be victor(승리자가 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한다. 즉 그 낯선 사람은 야곱을 능가하거나 극복하거나 승리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힘에 있어 분명 야곱보다 우세했기 때문에 그는 충분히 ‘승리자’가 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능가할 수 없었던, 혹은 극복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야곱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문맥상 이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능가할 수 없었다고 판단한 부분은 야곱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꺾는 것이었다. 에서가 자기를 죽일까봐 겁이 났던 야곱은 자기와 함께 한 무리를 세 떼로 나누어 자기보다 먼저 보냈고,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자기 가족들까지도 먼저 보냈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그러던 중 범상치 않은 사람(엘)을 만났고 그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한 것이다. 야곱은 그에게 자기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미 큰 부자가 되었던 야곱이 물질의 축복을 원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그가 ‘축복’을 통해 원했던 것은 자신의 목숨이다.

낯선 사람은 야곱에게 복을 주기로 마음 먹고 그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바뀌면 그와 함께 미래도 바뀐다는 관념은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야곱은 그 사람에게 자기 이름을 밝혔다(야곱은 ‘발뒤꿈치’와 관련된 말이다). 그러자 그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창 32:28).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것처럼 25절에서 ‘이겼다’고 번역한 말은 ‘야콜’이며 힘으로 싸워 이겼다는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에 28절의 번역(겨루어 이겼다) 역시 마찬가지 일 수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원문 확인이 필요하다.

창 32:28(마소라 본문 29절)에 따르면 ‘싸워서 이겼다’는 표현은 두 개의 동사가 쓰였는데, ‘싸웠다’는 말은 ‘끈덕지게 계속하다'(persist, persevere)라는 뜻의 ‘사라'(שרה)라는 단어이며, ‘이겼다’는 표현은 위에 언급한 ‘야콜’이 쓰였다. 이 두 동사 중 ‘이스라엘’의 어원으로 쓰인 단어는 ‘사라’이다. 즉 ‘이스라엘’은 ‘사라’에서 파생된 ‘이스라’와 ‘신’을 뜻하는 ‘엘’이 합성된 것이다. ‘이겼다’는 말과 관련된 ‘야콜’이란 동사는 ‘이스라엘’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엘을 이겼다’라는 뜻이 아니라 ‘엘께 끈덕지게 매달리기를 계속했다’라는 뜻이다.

이 일화에서 멋진 교훈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야곱의 생존에 대한 강한 열망은 비열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부인과 자식들까지도 먼저 떠나 보내지 않았던가! ‘엘’이 하사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자기 목숨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던 야곱을 묘사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렇게 고상한 이름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은 그런 야곱을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그의 요구에 못이기는 척 응답해 주었다. 내가 이 일화의 교훈으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 야곱처럼 이기적이 되거나 구차해 질 수 있다. 그러면 필시 누군가는 우리를 비난할 것이다. 구차하고 이기적인 내 모습이 미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야곱 같은 사람도 용납해 주었던 ‘엘’이 우리 자신에게도 자비를 베풀 것이라는 위로를 얻을 수도 있다. 물론 그것도 용납될 수 있는 정도가 있겠지만 연약한 인간이 의지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신에게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것은 신이 용납해 주실 수 있는 일이다. 야곱의 경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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