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교훈(2)

Excerpt

이 글은 유럽 사회가 미대륙을 침략하는 폭력적 과정에서 그들의 성경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드러내고 이러한 역사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해야 할지에 대해 논한다.
native american, sioux, sideview-6942576.jpg

희생자의 해석학

하나님은 과연 약자의 편인가?28) 기독교인들은 흔히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계를 상대로 침략과 수탈을 자행한 역사적 승리자, 유럽인들이 기독교 정신을 표방하였다는 것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하나님을 ‘승자의 하나님’ 혹은 ‘약자의 괴로움에 무관심한 하나님’으로 보이게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킬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첫 번째 과정은 지난 날 성경으로 정당화했던 기독교의 타자에 대한 폭력의 역사를 과오로 인식하늘 일이다. 나아가 우리는 성서 해석의 새로운 패러다임도 제시해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형상 회복이라는 과제는 희생자 중심의 해석학적 관점을 기초로 한 반성적 성경 읽기를 통해 기독교 윤리의 새로운 담론을 형성할 때 가능하다.

신학적 담론을 통해 사회 정의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형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많은 움직임들은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특별히 북미의 많은 성서학자들은 포스트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 혹은 탈식민주의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기존의 여성주의, 해방신학, 심지어 우리나라의 민중신학과 같은 정의 회복 담론을 통합적으로 이끌어 왔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성서학계는 이 조류에 아직 편승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RISS에서 ‘탈식민주의’나 ‘포스트콜러니얼리즘’과 같은 단어로 검색을 하면 신학 분야에서는 많은 논문을 찾을 수 있는 반면 성서학 분야에서는 결과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아울러서 검색 가능한 구약논단의 논문 중 탈식민주의적 관점을 소개하거나 채택하고 있는 글, 혹은 이와 유사한 기독교의 정의 회복 담론에 관련이 있는 글들 역시 많지 않다. 

유일하게 탈식민주의라는 키워드를 검색어로 등록한 서명수의 “한국적 구약학의 가능성을 위한 모색”은 정의 회복 담론이라는 주제를 다룬다기보다 서구 중심적 구약학 연구를 반성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데 그 초점이 있기에 기독교의 과오에 대한 반성적 성경 읽기와는 거리가 있다.29) 김지찬의 “한국 교회: 폭력의 원천인가, 도피성인가?”라는 글은 기독교의 폭력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는 중요한 논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쉽게도 그의 글 중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만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가한 폭력에 대한 민감성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30) 신앙적 순종의 행위로 정당화 되는 성경 속의 폭력 사건들을 말 그대로 폭력으로 다룸으로 반성적 성경 읽기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글은 거의 없다. 아마도 이윤경의 글이 몇 안되는 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윤경은 사사 입다의 딸에게 가해진 폭력을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희생양 메커니즘이란 관점을 가지고 풀어내는데, 본문 자체는 인신제사를 불사한 입다의 서원의 수행이라는 신앙적 관점을 견지하지만 이윤경은 입다의 딸은 결국 폭력의 희생양이었다고 받아들인다.31) 이윤경의 글은 우리 성서학계에 지라르를 소개했다는 점이 그 주된 공헌이라 하겠지만, 내가 본 연구의 맥락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가 입다의 딸이 당한 폭력을 서원의 수행이라는 말로 포장하는데 급급하지 않고 이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그 폭력의 배후에 있었던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반성적 성경 읽기의 중요한 예를 남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윤경의 글이 출판된 2013년 이후로 지금까지 이러한 해석학적 관점을 담은 학문적 담론은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지난 500여 년의 기간 동안 보여준 기독교의 과오는 ‘희생자의 해석학’의 수용과 ‘반성적 성경 읽기’가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호소하고 있다.

1) 관점의 전환을 통한 전복적 의미의 창출

희생자의 해석학은 필연적으로 관점의 전환을 요한다. 지금까지의 구약성경 해석이 오로지 이스라엘의 편에 서 있는 것이었다면 희생자의 해석학은 성경에서 ‘주인공’으로 여겨지지 않는 주변적 존재들의 관점을 반영한 성경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성경 읽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나는 이제 미대륙의 원주민들이 희생자의 후손으로서 그들만의 해석학적 관점을 가지고 읽어낸 성경 해석 세 가지를 소개할 것이고 이 예를 통해서 주변적 존재들의 관점에서 본 성경 읽기가 무엇이며 어떤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1) 가나안인으로서의 원주민

기독교 침략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진정한 ‘이스라엘’이라 여기고 미대륙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으로, 그리고 그 땅의 사람들을 사악한 가나안 족속으로 신학-유형화하여 정복활동을 수행했다. 희생자의 해석학을 토대로 한 반성적 성경 읽기는 이와는 정 반대로 가나안인의 입장에서 이 폭력적 침략과 정복의 이야기에 접근한다. 로버트 앨런 워리어(Robert Allen Warrior)가 이 출애굽기 본문에 관하여 쓴 글은 이러한 접근법을 적용한 대표적인 글이다. 

워리어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가장 큰 관심으로 삼는 해방 신학자들조차 가나안 정복이라는 사건을 오로지 이스라엘의 해방과 자유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며 그 해방의 뒤편에서 몰살당하는 가나안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한다.32)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스라엘의 해방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적 침략이었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에서 누리는 해방과 자유의 이야기는 이 출애굽기 본문을 읽는 사람이 스스로를 이스라엘과 동일시 할 때만 가능한 것인데, 학살당해 마땅한 가나안인으로 미리 규정된 미대륙의 원주민들에게 이 본문은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워리어는 기독교인이 출애굽기의 이야기들을 읽을 때 이스라엘을 향한 야웨의 구원 계획 뿐만 아니라 원주민 학살과 정복이라는 양면을 함께 읽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워리어는 아울러서 출애굽기의 가나안 정복 이야기가 가진 선천적 폭력성에 대하여도 주의를 기울일 것을 종용한다.33) 즉 누군가가 스스로를 이스라엘이라 여기고 타자를 가나안인이라고 여기는 신학-유형 논리에 빠진다면 가나안인에게 허락된 폭력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건(David Gunn)에 따르면 뉴질랜드 원주민인 테 쿠티(Te Kooti)가 이끄는 300명의 마오리(Maori)족 사람들은 파버티 베이(Poverty Bay)에 정착한 유럽의 정착민들을 학살 하였는데, 이때 테 쿠티는 자기 사람들을 이스라엘로, 또 그의 적들을 가나안사람들로 간주했다.34) 유럽의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 된 원주민들도 역으로 유럽인들에게 동일한 성경 해석으로 동일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는 테 쿠티의 성경 이해와 그의 종교적 열정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성경 해석자들이 희생자의 해석학적 관점을 통해 성경이 정당화하고 있는 폭력을 말 그대로 폭력으로 인식했다면 기독교인들은 인종 청소의 장본인이라는 오명을 가질 필요도 테 쿠티가 집단 학살을 자행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2) 변절자 룻, 민족주의자 오르바

한국 기독교에서 종종 ‘효부’로 인식되는 룻은 이방인으로서 다윗의 선조가 된 인물이다. 모압 사람으로서 남편을 잃고도 시어머니를 모시고 유대 땅으로 와서 야웨를 따르는 사람이 된 룻은 종종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으로 이해된다. 또한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다윗의 혈통에 들었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룻은 어쩌면 이상적 다문화 가정의 표상이라거나 문화적 교량과 같은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35) 

이 모든 긍정적 평가와는 달리 원주민 여성의 입장에서 룻은 전혀 다르게 평가된다고 도날드슨은 주장한다. 잘 알려진 대로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온전히 유대인에게 흡수되려 하였던 인물로 그려진다. 도날드슨에 따르면 유럽의 정복자들은 이러한 룻의 이야기를 원주민 여인 포카혼타스(Pocahontas)에게 적용시켜 유럽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하나의 이상적 원주민 여성상을 만들어냈다.36) 그리고 유럽의 남성 정복자들은 원주민 여성과의 결혼을 통해 그 여성들을 ‘포카혼타스’화 하곤 하였고 그 결과 원주민 여성들은 원주민 식민화를 가속화 하는 조력자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도날드슨은 유럽인들의 효과적이고 빠른 정복 정책의 방편이 되었던 포카혼타스 신화가 룻의 행적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지적하고, 따라서 원주민의 관점에서는 자기 민족을 선택한 오르바를 룻보다 더 중요하게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37) 물론 도날드슨의 해석 방식은 기독교의 교리적 관점에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도날드슨이 이상적으로 보고 있는 오르바라는 모압 여인은 회심이나 개종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결국 야웨를 포기하고 소위 우상 숭배의 길로 다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도날드슨의 반성적 성경 읽기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 기독교로의 개종과 회심이라는 관점에 매몰되어 간과해왔던 오르바와 같은 소위 이방인들의 삶을 이해와 공감의 자세로 대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교리적 관점에서 오르바를 안타깝게 여기고 룻을 칭송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각각의 선택이 가진 다층적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고 개종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라는 문제 외에 어떤 관심도 없는 성경 이해는 결과적으로 타자에 대한 기본적 배려 의식의 결여로 이어지게 된다. 도날드슨의 반성적 읽기는 그런 면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3) 베냐민 지파로서의 피쿼트 부족

나는 앞서 기독교 정복자들이 피쿼트 부족인 400여 명을 집단학살하는데 사사기 19-20장을 유용했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이 본문은 한 레위인의 첩이 경험한 극도의 성적 폭력과 시신 유린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이 반인륜 행위는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중요 사건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문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종종 이 사건이 베냐민 지파의 집단 학살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못하고 오로지 폭력을 당한 그 첩의 문제에만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페미니스트이자 동시에 탈식민주의자(postclonialist)인 도날드슨은 이러한 점을 꼬집어 비판한다. 도날드슨은 사사기 20장의 베냐민 지파 학살 기록이 뉴잉글랜드 정착인들의 정복 활동을 위해서 그들이 피쿼트인들에게 행사한 폭력과 살인을 정당화 하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부디 성경을 가나안인처럼 읽어달라(read like Canaanites)고 호소한다.38) 즉 희생자의 관점에서 반성적으로 성경을 읽어 달라는 것이다.

2) 끝나지 않은 문제들

희생자의 해석학을 통해서 성경을 반성적으로 읽는 것은 지금까지 기독교의 폭력의 역사 속에 희생당한 자들에 대한 사죄임과 동시에 대화적이고 평화로운 미래 건설에 대한 준비 작업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교리에 입각한 기독교 내부의 질서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교리는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는 해석이기 때문에 반성적 성경 읽기를 통해 새롭게 창출된 의미들은 기독교 내부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다는 어려움을 내포한다. 가령 희생자의 해석학을 통한 반성적 성경 읽기가 타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소위 ‘복음화’를 삶의 기조로 삼는 기독교인들은 과연 어느 선까지 타자의 삶을 존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필연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미대륙의 원주민인 두 학자의 성경관을 예를 들어 이 끝나지 않은 난제들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1) 찰스턴의 “미대륙 본토의 옛 언약 (Old Testament of Native America)”

 찰스턴은 그의 “미대륙 본토의 옛 언약”이란 글에서 자신이 새롭게 개념화 한 “구약/옛 언약”을 소개한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기독교의 정복자들은 어디를 침략하든지 그곳의 종교와 문화를 미개한 것으로 취급하였는데, 이를 비판하며 찰스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이 대륙의 선조들에게 하신 말씀은… 원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는 야만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는 모든 사람을 가까이 오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우리 본토는 이 부르심을 들었는가? 그렇다. 우리 본토는 신과 조우하였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나 신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었는가? 아니다. 다른 모든 인간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유한하며 실수를 한다. 우리가 받은 “옛 언약(old testament)”은 “구약(Old Testament)”처럼 실수와, 오류와, 추측과, 희망과, 꿈과, 소원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진실과, 예언과, 약속으로 가득하다.39)

찰스턴은 원주민들 자신의 전통 그 자체를 하나의 “옛 언약(old testament)”로 인정하여 성경의 개념을 확장시키고 원주민들을 서양 기독교의 교리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찰스턴은 미대륙의 원주민들과 같이 자신의 전통과 기독교 사이에서의 정체성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많은 정복당한 자들에게 하나의 해법을 제시하려고 하고 있다. 그는 이 신학적 관점을 확산시키는 것 자체가 바로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주장한다.40) 그러나 찰스턴의 관점을 지금까지 기독교를 지탱해 온 교리에 비추어 보면 그가 일으키려는 운동은 종교 혼합주의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결국 기독교인들은 어느 선까지 타자의 문화를 존중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봉착한다. 그러나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찰스턴의 신학적 고민을 함께 안고 가야한다. 성경을 통해 정당화한 폭력으로 물들어 있는 기독교의 과거사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면 소위 ‘성경적’이라는 기독교인의 막연한 관념에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보다 건설적 담론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2) 윌리엄 발드리지(William Baldridge)의 “우리 역사 되찾기(Reclaiming Our Histories)

원주민 신학자 발드리지의 입장도 위에 소개한 찰스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발드리지는 원주민들의 영성을 말살하려고 시도했던 과거의 선교 시스템에 반대하며 미대륙 원주민들이 가진 본연의 종교적 전통이 기독교 신앙 내에서도 존중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41) 위에 소개한 워리어라는 학자는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며 기독교는 원주민들의 전통과 섞일 수 없고 따라서 종교적 정체성도 분리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발드리지는 원주민의 전통을 고수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인식하고 있다. 즉 기독교인의 정체성의 개념을 스스로 재구성한 것이다. 발드리지는 원주민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해석은 반드시 기독교의 식민주의적 가치관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42) 그리고 그는 모든 원주민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전통적 종교적 영성을 위대한 유산으로 여겨 다른 기독교인들과 나누고 나아가서 자신의 정복 행위나 폭력을 성경을 통해 정당화하는 기독교인들을 그들의 그릇된 신념으로부터 구원해야 한다고 믿는다.43) 

발드리지에게 성경은 기독교 교리를 강화하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개혁의 도구로 여겨진다. 결국 발드리지의 성경관은 찰스턴의 관점과 같이 전통적인 교리적 성경 읽기에 도전하고 개혁하려고 하고 있으며, 따라서 찰스턴의 관점이 유발하는 것과 같은 질문을 자아낸다. 과연 ‘기독교인’의 정의(精義)는 무엇인가? 발드리지는 기독교인인가? 어떤 기준으로 기독교인을 정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적인가?

3)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희생자의 해석학을 통한 반성적 성경 읽기는 관점의 전환을 요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의미 전환을 전제한다. 새롭게 창출된 의미는 기독교의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전복적인 것일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성경 읽기 방식을 일종의 결론으로 여긴다면 지금까지 기독교를 지탱해 온 근간을 부정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 해석학 자체를 파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희생자의 해석학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기독교 윤리의 성서적 담론 형성을 위해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자의 해석학은 결론이 아니라 새로운 담론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보편적 성경 해석이 보여 주었던 관점을 탈피한 희생자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고 또 성경 본문의 다층적 의미들을 면밀히 살핀다는 것은 기존의 성경 읽기가 간과해 온 타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되살리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 읽기가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우리가 답해 나가야 할 우리 시대의 역사적 요구이다. 이 물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단순한 대답으로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우리가 만들어 갈 새로운 성경 해석의 담론을 통해 대답할 문제다.

나가는 말

미대륙 원주민들이 겪었던 침략과 정복의 경험, 그리고 이와 유착되어 있는 기독교(의 성경해석)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다. 일례로 미국 내에서는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s)이라는 극히 제한된 구역만을 원주민들의 독립적 영토로 인정하고 있는데 그나마도 계속해서 미국과의 크고 작은 분쟁을 겪으며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영토와 그 영토에서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16년, 북 다코타주에서 일리노이주를 잇는 거대 유류관(crude oil pipeline) 공사가 스탠딩 록 보호구역(Standing Rock Reservation) 일부를 지나게 됨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과의 협의 없이 진행된 사건이 있었다. CNN의 메디슨 박(Madison Park) 기자에 따르면 이 공사가 강행될 경우 스탠딩 록 부족 연합의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상징물들이 훼손될 뿐 아니라 그들의 식수 공급원이 심각하게 오염될 수 있어 스탠딩 록 부족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미국 연방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44) 이 문제는 한 때 공사 중지로 일단락 된 듯하였으나 BBC뉴스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로 다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45) 

침략과 정복의 역사는 원주민들에게 단순히 기억 속에만 자리 잡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현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인 이런 폭력의 배후에는 소위 보수라는 공화당과 그의 신실한 기독교 지지자들이 있다. 이처럼 기독교가 하나의 집단 권력을 이루어 폭력적이고 부도덕한 일을 행하고 이를 성경에 기반 한 종교적 믿음으로 정당화 하는 것은 현대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과연 한국의 기독교는 이러한 오류로부터 안전한가? 전통적 해석의 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에 대한 폭력은 정당한 것이고, 병과 가난은 하나님의 채찍이며, 부요함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모든 타종교는 악일뿐이다. 이러한 성경 이해는 기독교인의 세상 보는 관점을 극단적으로 단순화 하여, 본문에서 많은 예를 들어 설명한 것처럼, 차별, 배제, 혐오, 폭력, 심지어 살인까지도 경우에 따라서는 용인하거나 정당화하는 데에로 이어진다. 

이 논문이 제시하는 희생자의 해석학 혹은 포스트콜로니얼 성서 해석의 담론이 아직 시작되지 못한 한국 기독교는 지난 유럽 기독교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그들과 같은 성경을 가졌고 그들과 유사하게 성경을 이해하는 한, 그들과 비슷한 과오를 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집단임을 스스로 자각 하여야만 한다. 유럽의 기독교에서 뉴질랜드의 마우리 부족으로,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인 기독교인들로 지난 500여 년의 기독교의 과오는 여전히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과연 기독교인들은 이 역사의 현장 앞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희생자의 해석학을 통한 반성적 성경 읽기는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될 과제가 되었다.

참고 자료

  1. 여기서 ‘약자’라 함은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한 한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의 피해자를 말한다. 하나님이 이러한 약자의 편이라는 의식은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기 때문에 개인이 극복할 수 없는 사회 구조적 폐단 속에서 강자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편에 서실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2.  서명수, “한국적 구약학의 가능성을 위한 모색”, 「구약논단」 21권 4호 (2015년 12월), 209-231.
  3. 김지찬, “한국 교회: 폭력의 원천인가, 도피성인가?”, 「구약논단」 14권 1호 (2008년 3월), 51-69.
  4. 이윤경,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읽는 입다의 딸 이야기”, 「구약논단」 19권 3호 (2013년 9월), 96-122.
  5. Robert Allen Warrior, “Canaanites, Cowboys, and Indians: Deliverance, Conquest, and Liberation Theology Today”, Native and Christian, 93-104.
  6. Warrior, 윗글, 99.
  7. David M. Gunn, “Colonialism and the Vagaries of Scripture: Te Kooti in Canaan (A Story of Bible and Dispossession in Aotearoa/New Zealand)”, Tod Linafelt and Timothy K. Beal(ed.), God in the Fray: A Tribute to Walter Brueggeman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8), 127-42.
  8. 참조. Donaldson, “The Sign of Orpah: Reading Ruth Through Native Eyes”, Athalya Brenner(ed.), Ruth and Esther (A Feminist Companion to the Bible (Second Series) 3;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9), 136.
  1. 넬 피워디(Cornel Pewewardy)에 따르면 대중에게 알려져 있는 포카혼타스의 이야기는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포카혼타스는 유럽인과 사랑에 빠져 자발적으로 유럽인들에게 협력한 것이 아니며 정복자들을 위하여 자기 사람들까지도 희생 시킨 것도 아니다. 그는 유럽인들의 꾐에 넘어가 납치 감금되었다가 결국 기독교인가지 되었으며 영국인과 결혼하게 되었다. Cornel Pewewardy, “The Pocahontas Paradox: A Cautionary Tale for Educators”, Journal of Navajo Education 14, no. 1-2 (1996/1997): 20-25.
  2. Donaldson, 윗글 (1999), 143.
  3. Donaldson, “Postcolonialism and Biblical Reading: An Introduction”, Postcolonialism and Scriptural Reading (Semeia 75; Atlanta: The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1996), 8.
  4. Charleston, 윗글, 74.
  5. 윗글.
  6. Baldridge, “Reclaiming Our Histories”, Native and Christian, (1996. ㄱ), 83-92.
  7. Baldridge, 윗글 (1996. ㄱ), 83-92. 참조. Baldridge, “Native American Theology: A Biblical Basis”, Native and Christian, (1996, ㄴ), 101.
  8. Baldridge, 윗글 (1996. ㄱ), 83-92.
  9. Madison Park, “5 things to know about the Dakota Access Pipeline,” CNN, August 31, 2016, http://edition.cnn.com/2016/08/31/us/dakota-access-pipeline-explainer/index.html
  10. BBC, “Dakota Pipeline: What’s behind the controversy?,” BBC News, February 7, 2017, http://www.bbc.com/news/world-us-canada-37863955

2 thoughts on “비극의 교훈(2)”

  1. Pingback: 여호수아(신명기)의 진멸법(헤렘법) – unofficial bible ・ 언오피셜 바이블

  2. Pingback: 비극의 교훈(1) - unofficialbible.com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