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여호수아서는 다양한 난제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야웨의 군대 대장이 등장하는 수 5:13-15이다. 그는 갑자기 여호수아 앞에 나타나 뜬금 없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야웨께서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이다. 야웨는 모세에게 자세한 계시를 내리셨지만, 이 본문에서 군대 장관은 별다른 말이 없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본론(1): 전쟁 관례 문헌과 여호수아 비교
결론부터 말하자면, 뢰머에 따르면 수 5:13-15는 신명기사가의 신학적 의제를 표현한 창작물로, 형태상 고대 근동의, 특히 아시리아의 정복 이념과 전쟁 관례(ritual) 혹은 의식(practices)을 표현한 문서들에 영향을 받았다(51, 참고로 뢰머는 성경 본문의 역사성을 대부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소위 미니멀리스트 성서학자임). 즉 야웨의 군대 장관의 등장은 신의 가호를 담보하는 당시 전쟁 관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전쟁 관례 문헌의 하나인 아시리아의 문헌을 살펴 보자.
에살핫돈, 땅들의 왕, 두려워 말라… 나는 아르벨라의 이슈타르이니, 내가 너의 적들을 쳐서 그들의 너에게 넘기리라. 나는 아르벨라의 이슈타르, 내가 너보다 앞서 가며 또 너의 뒤에 있으리라(사역).
“Esarhaddon, king of the lands, fear not … I am Ishtar of Arbela, I will flay your enemies and deliver them up to you. I am Ishtar of Arbela. I go before you and behind you”.
Martti Nissinen, Prophets and Prophecy in the Ancient Near East (SBJWAW 12; Atlanta: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03), 102.
여호수아 11:6은 이와 유사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11:6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 주어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 하시니라
개역개정
과연 이 두 문헌이 말 그대로 역사일까? 여호수아서에서 말한 것처럼 야웨께서 여호수아에게 정말 이스라엘의 적군을 ‘몰살’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셨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시리아의 문헌을 그들의 프로파간다로 이해해야 한다면, 이와 유사한 여호수아서 역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같은 장르의 문학으로 보아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뢰머에 따르면 이런 식의 표현은 고대 근동의 전쟁 관례/의식을 표현하는 문헌들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일종의 표현 양식이다. 다른 예도 살펴 보자.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간 나머지 사람들에게… 아다드, 맹렬한 자, 아누의 아들, 용감한 자, 그가 큰 소리로 그들에게 외쳤다; 그리고 홍수의 구름과 하늘의 돌로써 그가 남은 자들을 완전히 멸절시켰다(사역)
“The rest of the people, who had fled to save their lives … Adad, the violent, the son of Anu, the valiant, uttered his loud cry against them; and with flood cloud and stones of heaven, he totally annihilated the remainder.”
K. Lawson Younger Jr., Ancient Conquest Accounts: A Study in Ancient Near Eastern and Biblical History Writing (JSOTSup 98; Sheffield: JSOT Press, 1990), 210.
위 예시는 여호수아 10:11과 견줄 만 하다.
수 10:11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 덩이를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
개역개정
뢰머가 주장하는 것처럼 여호수아서에는 고대 근동의 제국, 특히 아시리아의 위상을 드높이는 이념적 문헌들 혹은 전쟁 관례/의식 문서들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뢰머는 이를 근거로 여호수아서가 아시리아 제국의 전쟁 이념을 수용하여 그 신학적 의제를 표현하려고 쓴 글이라고 이해하며, 야웨의 군대 대장 관련 본문(수 5:13-15)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본문(2): 전쟁 관례 본문으로서의 '군대 대장 출현 본문'
이제 본문을 보자
5: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개역개정
이 단락의 내용은 매우 강렬할 인상을 남기지만 마지막에 가서 어딘가 부족한 느낌을 주며 끝난다. 군대 대장은 뭔가 중대한 사안을 위해 갑자기 여호수아 앞에 나타났지만 사실상 별다른 계시를 주지 않았으며 큰 활약을 보여 주지도 않는다. 단지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했을 뿐이다. 만일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 속에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는 말을 듣고 그후로 아무런 명령이나 계시도 듣지 못했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여호수아의 경우 야웨의 군대 대장은 그와 같은 말을 하고는 그냥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 5장이 끝난다.
뢰머는 이러한 전개는 여호수아서 6장의 편집 과정에서 생긴 문제라고 보고 본문을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5: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6: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개역개정
뢰머는 5:15(신을 벗으라는 명령)과 6:1(여리고 성이 굳게 닫혀 있었다는 내용)은 후대의 편집 과정의 산물이며 야웨의 군대 대장 단락의 원래 형태는 위처럼 5:14이 6:2로 바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5장에서의 야웨 군대 대장이 6장에서는 야웨로 바뀌어 등장하지만 이렇게 야웨의 사자가 갑자기 야웨로 바뀌어 등장하는 예는 구약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군대 대장의 출현이 용두사미로 끝나는 문제도 뢰머의 읽기를 따르면 꽤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에피소드가 여기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뢰머는 여호수아서가 고대 근동 아시리아의 전쟁 의식/관례를 담고 있는 문서들에 영향을 받았고, 또 여호수아서 역시 그러한 전쟁 의식/관례를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표출하고자 했다고 본다. 특히 그가 야웨의 군대 대장 본문도 그렇게 보는 이유는 여호수아 본문과 유사한 내용의 글이 아시리아의 문헌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관련된 아시리아 문헌에서 중요 구절을 확인해 보자.
이슈타르가… 내게 말했다: “두려워 말라!”…… 바로 그날 내가 그(이슈타르)에게 탄원을 올려 드렸을 때, 한 예언자가 내게 일러 주기를…: 아르벨라에 거하시는 이슈타르가 나타나셨다. 그 손에는 활을 잡았다. 그는 날카로운 검을 잡았고, 전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나는 나의 계획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대는 그(이슈타르)에게 말했다: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나 높으신 여인께서 그대에게 답하셨다: ‘너는 여기 너의 자리에 머물라… 내가 그 과업을 완수하기까지.'(사역).
Ištar… said to me: “fear not!”…… The very same night as I implored her, a visionary (šabrû)… reported to me…: “Ištar who dwells in Arbela entered,… holding a bow in her hand. She had drawn a sharp-pointed sword, ready for battle…… Ištar, the highest of the gods, called you and gave you the following order: ‘you are prepared for war, and I am ready to carry out my plans.’ you said to her: ‘Wherever you go, I will go with you!’ but the lady of ladies answered you: ‘you stay here in your place … until I go accomplish that task.’ ”
Nissinen, Prophets and Prophecy, 147–48.
위 글은 이슈타르의 예언자가 아시리아의 한 왕에게 나타나 전한 말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을 우리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아시리아의 정복 이념이 반영된 전쟁 관례/의식 문헌으로 봐야 한다. 만일 여호수아서가 이 문헌과 같은 장르의 문헌이거나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면 여호수아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뢰머는 주장한다.
따라서 예언자가 전한 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당연히 여호수아서 기록과의 유사성이다. 이슈타르는 마치 야웨의 군대 대장처럼 무기(활과 날카로운 칼)를 들고 서 있다. 이슈타르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야웨의 군대 대장도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6장에서는 그 전쟁이 일어난다). 아시리아의 왕은 이슈타르를 따라 나서서 함께 싸우려고 했지만 이슈타르는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말한다. 마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야웨께서 여리고와 싸워 주시는 것과 같다. 이슈타르는 그가 이 일을 완수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한다. 야웨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돌고만 있을 뿐이다.
여호수아의 군대 대장의 계시가 ‘신을 벗으라’는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뢰머의 말대로 6장 2절로 이어지며, 전쟁에 대한 계시를 전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면 위 아시리아의 문헌과 여호수아는 상당히 유사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두 문서간의 상관성은 여호수아서의 기록이 고대 근동의 전쟁 이념, 전쟁 관례/의식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 (뢰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본문이 아시라이의 왕권 프로파간다인 만큼 군주적 여호수아의 지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함)
나가는 말
여호수아서는 정복 전쟁과 땅의 분배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글로, 신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다는 부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성서-비평학에 대한 이해가 없는 독자들은 이런 부분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신의 개입’이라는 관점은 현대의 ‘역사’ 개념에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역사로서의 사실 입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서를 비롯한 역사서를 ‘역사’라고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해석이다. 그러나 이 해석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패배자요, 포로에 불과했던 포로 후기의 유대교 공동체가 그들의 부정적 정체성을 떨쳐내고 다시금 영광스런 이스라엘을 꿈꾸며 아시리아의 정복 이념과 전쟁 관례 문학을 차용하여 이념적 문학을 창작해 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자기가 처한 시대의 과제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코로나 유행병 시대를 지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신학적으로 대응해 왔던 것처럼, 포로 후기의 유대인 공동체는 건국 이념을 구축하기 위해 용사이신 야웨의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해 나가는 이야기가 필요했고, 정복자로서 아시리아가 생산해 낸 유명한 전쟁 관례 문헌들이 그 과정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여호수아서는 ‘역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해석이지 여호수아서의 본질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역사의 관점에서 이 책을 보게 되면 본문을 곡해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서에는 분명히 역사가 아니라고 확정할 수밖에 없는 본문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호수아가 기브온 백성을 위해 벌인 전쟁(수 10장)에서 야웨는 태양과 달을 종일토록 멈추셨다고 하는데, 이는 고대의 우주에 대한 비과학적 이해에서 비롯된 기록으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신이 크고 작은 광명체를 이리 저리 움직일 수 있다는 사고가 반영되어 있다.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 되려면 지구는 자전을 멈춰야 하며 달은 공전을 멈춰야 한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여호수아의 전쟁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을 필요도 없다. 이는 명백히 역사가 아니다. 따라서 성경의 독자는 성경을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뢰머의 비교 문헌 연구는 여호수아를 ‘역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독자들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나 나는 이 역시도 하나의 이해 방식은 되겠지만 유일한 정답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여호수아 앞에 갑자기 나타난 ‘야웨의 군대 대장’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양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모든 답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가 아니라면’이라는 중요한 가정 혹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