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알렉산더 대왕

Excerpt

다윗과 알렉산더가 어떤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이 글은 아리안'(Arrian)이라는 작가가 쓴 ‘알렉산더의 아나바시스(campaign, 원정)’라는 문헌과 삼하 23:13-17을 비교하여 그 연관성을 보여 준다.
Alexander the Great
Alexander the Great in the Alexander Mosaic at the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Naples, Italy

알렉산더와 다윗에 대한 이야기

“다윗과 골리앗”은 들어 봤어도 “다윗과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윗은 기원전 10세기 경의 사람이고 알렉산더는 기원전 4세기의 사람이다. 다윗은 팔레스타인에 살았고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헬라제국 왕이다. 지역적으로나 시대적으로나 이 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이 무슨 상관이 있길래 “다윗과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글이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흥미로운 이야기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알렉산더 이야기

군대를 이끄는 용맹한 지도자라는 점에서 우리는 알렉산더를 다윗과 견줄 수 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의 공통점을 가지고 ‘다윗과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군지도자로서의 알렉산더에 대한 기록은 흔히 2세기의 ‘아리안'(Arrian)이라는 작가가 쓴 ‘알렉산더의 아나바시스(campaign, 원정)’라는 문헌이 가장 자세히 다루고 있다고 평가하는데, 이 기록에는 성경의 다윗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일화가 등장한다. 다음은 아리안의 아나바시스 6권 26장의 첫 부분이다.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알렉산더의 가장 숭고한 행적을 여기 소개하려 한다. 이 사건은 이 땅(역자주: 가드로시아 사막)에서 일어난 것인데, 어떤 작가들은 그보다 더 일찍 파라파미시아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뙤약볕이 타오르는 중에도 군대는 물을 얻기 전에는 모래 위 행군을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먼 길을 지나 왔다. 알렉산더 자신도 갈증으로 괴로웠지만 병사들과 똑같이 고통과 괴로움을 견디며 군대를 이끌고 걸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일반적으로 그렇듯, 군사들이 고통을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군인들 중 몇 명이 가볍게 무장을 하고 물을 찾아 군대에서 멀리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그들은 물을 발견했는데, 작고 보잘것없는 시내에서 갈라진 틈에 고인 물이어서 그 물을 어렵사리 모았다. 그들은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최대한 빠르게 알렉산더에게 돌아갔다. 왕 앞에 당도하여 그들은 물을 투구에 담아 그에게 바쳤다. 물을 받고 그는 이를 가져온 자들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즉시 물을 땅에 부어 버렸다. 이 행동의 결과로 온 군대는 놀라울 정도로 다시 활력을 되찼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알렉산더가 뿌린 물이 마치 모든 사람을 해갈하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알렉산더의 모든 행적 가운데에서도 특히 이 일화를 그의 인내력과 자제력, 그리고 군대를 지휘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뛰어난 증거로 천거한다(사역).

원문 출처: gutenberg.org

흥미롭지 않은가! 이 이야기는 삼하 23:13-17과 신기할 정도로 유사하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보지 말고 그냥 두 이야기를 바로 비교해 보자.

1. 다윗과 알렉산더 모두 왕이며 군지휘관으로 행동한다.

2. 두 이야기 모두 군사작전 중 물이 없어 곤욕을 치르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3. 두 이야기 모두 소수의 용사들이 지휘관을 위해 물을 가져 오는, 목숨을 건 용맹한 활약을 그리고 있다.

4. 두 이야기 모두 지휘관이 목이 말라 고생을 하는 상황에서도 그 물을 혼자 마시지 않고 땅에 버리는 행동을 취한다.

이 두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마치 누가 누구를 모방하기라도 한 듯 하다.

물론 차이점도 분명하다. 알렉산더는 모든 병사들이 더위와 갈증에 시달리는 중에 자기만 해갈을 하는 것이 군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여 물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다윗은 그 물을 군 사기를 위해 버린 것이 아니라 땅에 부어 하나님께 바쳤다.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개역개정). 다윗의 행동과 그의 발언은 실용주의 입장에서 보면 의미를 찾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다윗의 행동은 창 35:14에서 야곱이 전제물을 땅에 붓는 행위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은 용사들의 목숨 값과 같은 물을 ‘공물'(offering)로 여겼고, 이를 받으실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물을 땅에 부어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A. Anderson, 2 Samuel,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1). 나아가 삼하 23:13-17은 다윗의 수하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놓은 문단의 일부에 다윗에 대한 언급이 부수적으로 포함된 것이지만 아나바시스의 알렉산더 이야기는 알렉산더가 전체 이야기의 중심이다.

떠오르는 질문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이야기는 동일한 이야깃거리를 활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성경의 이야기가 경전과 전혀 관계가 없는 세속 이야기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은 몇 가지 질문을 자아낸다. 함께 질문하고 또 답해 보자.

1. 어떤 본문이 원조인가?

개신교 구약성경의 어떤 본문도 기원후에 쓰여진 것은 없다. 아리안은 기원후 2세기의 사람이므로 구약성경인 사무엘하의 기록 시기가 당연히 ‘아나바시스’보다는 앞선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알렉산더의 이야기가 사무엘하의 기록을 모방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아리안의 글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기원전 4세기 톨레미(Ptolemy) 시대의 칼리스테네스(Callisthenes)의 기록을 사료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칼리스테네스는 알렉산더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의 기록은 사실에 기초하여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삼하 23:13-17은 후대에 삽입된 부록같은 이야기이다. 헬라시대의 유대인 작가가 알렉산더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후 이와 같은 부록을 추가했을 가능성이 칼리스테네스가 사무엘서를 모방했을 가능성보다 월등히 높다.

2. 아리안의 ‘아나바시스’가 원조라면, 그 기록은 반드시 역사적 사실이고 삼하 23:13-17은 아나바시스를 모방한 것이라고 보아야만 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고대의 ‘역사책’들은 현대의 역사와 달리 엄격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였다기보다 특정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위해 허구적 이야기를 포함할 수 있는 문헌이었다. 알렉산더에 대한 기록 중 어떤 것들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이겠지만 수하가 어렵게 구한 물을 땅에 쏟아 버렸다는 정도의 자세한 일화들, 특히 그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분명한 세세한 이야기들까지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아리안이 참고했다고 하는 칼리테네스의 문헌은 당시 저자가 알고 있던 더 고대의 위인에 대한 구전 무용담이나 민담 같은 것을 각색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삼하 23:13-17에 공통되는 내용이 등장하는 이유는 단지 서기관이 모방했기 때문이 아니라 칼리테네스가 알고 있던 이야기를 그 서기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3. 사무엘하 23:13-17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면 이 본문은 무슨 의미가 있나?

결국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의 역사성이기 때문에 이 본문의 역사성이 도전받게 되면 그 본문의 의미 또한 도전받게 된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성경관에 대한 근본적 인식과 관련이 있다.

4. 성경의 기록은 반드시 역사적 사실이어야만 하는가?

고대의 문헌으로서 성경은 고대인들이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틀 안에서 쓰여졌다. 즉 성경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어도 고대인들에게는 충분히 진리를 전달하는 문서로 수용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현대인의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글이었다면 성경은 오히려 기록 당시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중요성과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후대에 전달되지 못하고 소멸되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혹은 우리가 그 안에서 적절한 해석을 통해 어떤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이지 기록 자체의 역사성이 아니다.

마치며

다윗이 자기 수하가 목숨을 걸고 구해 온 귀중한 물을 하나님께 전제물로 부어 바친 이야기는 알렉산더가 혼자만 갈증을 해소하지 않고 병사들과 함께 고통을 감내한 일화를 차용했거나 더 고대의 공통 소재를 활용했을 것이다. 그러니 삼하 23:13-17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크다. 만일 당신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이 성경 기록의 역사성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경의 모든 기록을 ‘무조건’ 사실로 믿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자신의 고집을 지킬 수는 있으나 역사 왜곡이라는 댓가를 치르게 된다. 예컨대 삼하23:13-17이 알렉산더의 일화와 공통점을 갖는 이유는 그냥 우연이거나 아리안이 성경을 모방했다고 믿어야 한다. 어떤 이는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신앙을 지키는 행동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선택하고 판단하고 믿었던 것이 ‘잘못일리 없다’는 심리적 방어기재가 실체적 사실을 부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멀리 본다면 이런 태도로 소위 ‘신앙’을 지키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신앙이라는 집을 반석위에 짓으려면 우선 성경이 ‘역사책’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고대의 문서를 현대 사회에 맞게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신학적 사고력을 증진시키는 훈련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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