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종교화 시대의 개신교 교회(3)

Excerpt

70-80년대 교회를 개척했던 목회자들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회 성장에 헌신했던 분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경험이 목회의 패러다임이 되어 현재까지도 개신교 교회의 전반적인 조직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과거의 ‘헌신’이 지금의 ‘갑질’이 된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탈종교화 시대의 개신교 교회(3)

세 번째 이야기: 헌신과 갑질 사이

들어가는 말

이전 글에서는 탈종교화 현상으로 지역 교회가 급격히 축소되는 시대의 문제와 더불어 젊은 목회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목회자가 되려는 젊은이들이 적절히 쉬지도 또 적절한 수준의 경제력도 갖추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해야 한다면 탈종교화 시대에 누가 목회를 하려고 하겠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글이었다.

이번 글은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문제로, ‘갑질’이 ‘헌신’으로 포장되는 목회자 세계의 고질적인 조직 문화에 대한 이야기이자,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먼저 나의 간접 경험 이야기로 말문을 열어 보고자 한다.

신학교의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은 대부분 부목사들이다. 수업을 하다 보면 자연히 그들의 교회와 담임목사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늘어 놓는 담임 목사 이야기들은 사실상 우리가 인터넷에서 자주 접하는 ‘갑질’과 다름 없는 것들이다. 표면적으로는 ‘헌신’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갑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담임목사들은 어쩌다가 갑질에 익숙해 졌을까? 잠깐 옛날로 돌아가 보자.

그때 그 시절 이야기

70~80년대에 교회를 개척하여 현재 한국 개신교 교회의 양적 성장을 일궈낸 목회자들은 지금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교회에 ‘헌신’한 분들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밤낮없이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 준 분들이다.

그들은 주일 아침 1, 2, 3부 예배 설교를 하고, 저녁 예배에 또 설교를 하고, 다음 날 새벽부터 일주일 동안 또 새벽 마다 나와서 설교를 하고 거기에 1시간씩 기도를 하고 나서야 집에 돌아 온다. 주 중에는 성도들을 찾아 다니며 심방을 하고 그들이 교회에 잘 출석할 수 있도록 교육한다. 그리고 또 수요일 저녁 기도회에 설교를 하고 금요일 철야 혹은 심야 기도회에 설교를 하고 기도회를 인도한다. 그리고 또 주일을 맞이한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에는 주말이면 등사기를 사용해 주보를 만들기도 했었다. 컴퓨터 문서 작업 처럼 손쉽게 편집할 수도, 인쇄를 할 수도, 복사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주보를 한 번 만들려면 몇 번씩 오타를 수정하여 다시 만들기를 반복해야 한다. 그 시절에는 주보 하나 제작하는 일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이 시대의 목회자들은 자기를 돌 볼 시간이 없었다. 오로지 교회만 있었을 뿐이다. 요즘 말로 ‘워라밸’은 그 분들께는 불경스럽기까지 한 생각이다. 교회의 성장에 자신과 가족의 생존이 달려 있었기에 그들은 목회에 모든 것을 바쳤다. 과거의 목회자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목회’를 정의한다.

7080시대 문화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헌신’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생을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달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나는 그것이 시대적 상황과 결을 같이 한다고 본다.

70-80년대에는 다들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조직 문화는 철저히 수직적이었고,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졌다. 이런 문화의 배후에는 전쟁 후 폐허를 딛고 다시 일어서고자 했던 시대적 요구가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군부독재가 만들어 놓은 사회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사람들은 ‘산업화’, ‘경제 성장’ 등의 명분 아래 ‘평생 직장’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밤낮 없는 노동을 강요 당했고 인권이란 단어는 생소하기만 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헌신’도 그와 유사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운동가 전태일님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님이 영정을 안고 있는 사진
노동운동가 전태일님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님이 아들의 영정을 안고 있는 사진
전태일님의 분신 사건은 당시 노동 환경과 소위 '헌신'적 노력에 대한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담임 목회자가 겪었던 고생이 헌신의 정의가 되었고, 교회를 성장 시킨 담임 목사의 경험이 목회의 정석이 되었고, 그의 말은 신적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 어려웠던 70-80년대에 교회를 개척하여 일평생 일궈온 노년의 목회자들의 헌신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목회의 패러다임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은 문제가 된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자, 지금을 살아가는 자

그동안 사람들의 의식은 진보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 자본주의에 대한 의식, 인권 의식,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의식 등 많은 면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부분 부합한다. 그런데 교회의 핵심 인물인 ‘담임목사’는 많은 경우 여전히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목회자는 자신의 삶을 신에게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헌신’이란 과거의 ‘헌신’과는 다르다.

그들에게 헌신은 고생과 동의어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지시와 명령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통’을 통해도 찾아가는 것일 수 있다. ‘무조건’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오히려 납득과 합리성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 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개인과 집단의 이익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 당연히 무엇에 어떻게 헌신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방식도 바뀐다.

모든 개인은 자기가 속한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과거 목회자들이 과거의 시대 정신의 산물이듯 MZ세대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누구도 절대로 옳고 그르지 않다. 다만 시대가 변했고 지금 이 시대가 목회자에게 요구하는 것도 변했다. 만일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시대만이 옳았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과거 목회자 세계의 폐쇄성, 비합리성, 수직 구조 등과 같은 조직 문화는 당시 시대적 정황 속에서 나름 그 기능을 했다.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그때는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또 그런 헌신을 통해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했고 과거 문화는 그 역할과 수명을 다했다.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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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한 사람의 시민으로 경험한 의식의 변화는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부분 부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변화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세속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변화에 적응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변화시킨 사회적 가치가 하나님의 뜻에 대부분 부합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흐름을 선도했어야 할 교회는 오히려 그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의 사례를 생각해 보자. 노예 제도나 신분 제도 같은 구시대의 유물들이 폐지되고 평등한 사회로 전환된 것은 세속 정치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러한 전환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 미국 여성의 참정권도 여성주의 운동으로 이루어 냈다. 하지만 구시대의 목회자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외치며 늘 과거에 머물기를 고집했었다.

첫머리에 언급했듯이 부목사들이 전하는 담임 목사의 헌신 강요에 대한 증언들은 목회자들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그들이 헌신이란 이름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갑질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도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시각에서 탈종교화의 원인을 찾을 수 있겠으나 시대에 역행하는 목회자들이 탈종교화를 부추기는 면도 있어 보인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소통하는 창구가 되어야 하는데, 목회자가 그런 장을 만들어 주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고 있다면 교회의 양적 축소는 더 가속화 될 것이다.

그러나 양적 축소는 기독교의 본질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본질은 살아남을 것이다. 양적 축소는 대부분의 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이럴 때 일 수록 오히려 본질과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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