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나는 이미 ‘여호수아와 신명기’라는 제목과 주제로 두 개의 글을 올렸다. 그 글의 주된 관심은 ① 신명기가 앞선 네 권의 책(창~민)과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과 ② 여호수아서는 소위 ‘신명기적 역사’의 일부분으로서 신명기와 깊이 연관된다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이번엔 방향을 정반대로 잡아 보았다. 즉 여호수아서가 신명기라는 특정 본문과만 관련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네 권(창~민)과도 관련된다는 것이다. 마르틴 노트는 그가 ‘신명기적 역사’로 분류한 전기예언서들(수, 삿, 삼, 왕)을 말 그대로 ‘신명기적'(Deuteronomistic)이라고 이해했고, 후대의 많은 학자들도 (다양한 비평을 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신명기적 역사’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그래서 여호수아를 포함한 소위 ‘신명기적 역사서들’은 ‘신명기적’이라는 면에서 일관성을 보여줄 것이라는 오해를 일으키게 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여호수아나 혹은 다른 신명기적 역사서들은 ‘단성'(homophonic)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다성'(polyphonic)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수아서의 실체를 보기 위해 반드시 여호수아서와 오경 전체의 연관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그와 관련한 단편적인 예 세 가지만 들어 보도록 하겠다.
먼저 생각해 볼 점: 민수기에서 신명기를 건너뛰고 바로 여호수아로!
신명기는 요단 강을 건너기 전, 모압 광야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마지막 말을 담고 있다. 그리고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을 건넌다. 분명 여호수아서는 신명기의 흐름을 이어받고 있다. 그런데 이 전개는 사실 신명기의 흐름을 이어받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명기 이전에 이미 민수기 21장 이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함께 모압 땅에 도착하여 요단 강을 건널 채비를 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민수기에 따르면 모압 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은 요단 동편을 점령했고, 요단 동편 지파의 땅도 배분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넌 후 살아야 할 땅의 경계가 어디인지, 그들의 인구는 얼마인지, 땅을 분할 해야 할 책임자는 누구인지, 레위인들은 어디에 거해야 하는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지켜야 할 율법은 무엇인지 등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내용상 신명기 없이 민수기에서 바로 여호수아로 건너뛰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여호수아는 민수기 다음에 바로 나와도 흐름상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신명기가 민수기와 여호수아 사이에 위치해도 시간 흐름상 이상한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신명기의 내용을 보면 문제가 조금 생긴다. 우선 창세기를 제외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는 모두 접속사 ‘바브’로 시작하여 전개가 이전 책에서 다음 책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반면에 신명기는 첫 구절, 첫단어를 접속사로 시작하지 않아 민수기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나아가 신명기가 보여 주는 율법도 앞선 책들에서 선포된 율법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신학적으로도 앞선 책들과 상충되는 부분이(혹은 독특한 신명기적 관점이) 여럿 등장한다. 이런 부분을 고려해 보면 신명기는 민수기에서 여호수아로 넘어가는 길목에 끼어들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신명기와 여호수아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기 때문에 민수기와 여호수아를 연결시키고 신명기를 제외시켜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여호수아서가 매우 독특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신명기와 배타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앞선 네 권의 책과도 매우 긴밀히 연결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호수아서가 신명기 뿐 아니라 그 앞선 네 권의 책과도 연결된다는 것은 결국 ‘육경'(‘창~수’까지를 하나의 모음집으로 묶는 개념)이라는 개념을 인정해야 한다는 인상을 남긴다. 어떤 면에서 그런지 세 가지만 간단히 살펴 보자.
1
여호수아서의 마지막은 요셉의 매장 이야기로 끝난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시작된 요셉의 이야기를 이어받은 것이다. 창세기 50:25에서 요셉은 자신의 유골을 메고 올라가 달라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부탁했고, 모세는 이 말을 수행하기 위해 요셉의 유골을 들고 애굽에서 나온다(출 13:19). 그리고 여호수아서에서 요셉의 유언은 성취된다. 특히 여호수아 24:32에서 요셉이 매장된 곳에 대하여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창세기 33:18의 이야기를 정확히 되짚고 있는 것이다. 만일 여호수아서가 오직 신명기와만 배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이러한 문학적 흐름을 공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 24: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창 33: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개역개정
2
두 번째는 여호수아서에서 실행된 율법과 신학에 관한 것이다. 여호수아서가 ‘신명기적 역사’라면 여호수아서의 내용은 신명기의 법전이나 신학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경’과 ‘신명기’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 있어서 여호수아서는 분명 ‘신명기’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신명기의 주요 법전과 신학을 일관되게 따르고 있지 않다. 예컨대 신명기 20:16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조치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에서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에서 이 명령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첫 관문인 가나안에서 라합과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렸다. 심지어 여호수아서는 라합을 ‘야웨 경외’의 표상처럼 그리기도 한다(수 2). 이는 분명 이방인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보이는 신명기의 관점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창~민’ 본문 중 이방인에 대해 우호적인 단락들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수 2: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개역개정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위 구절은 라합이 야웨의 행적에 대하여 듣고 야웨를 두려워하는 마음(야웨 경외)이 생겼다는 사실과, 야웨가 세상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라합이 말한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으니 너희도 우리를 선대하라”라는 말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그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신다는 약속을 생각나게 한다. 반면에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모두, 그리고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명령한다.
3
마지막으로 간단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여호수아서의 정복 전쟁과 땅의 배분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야웨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야웨의 약속을 받아 갈대아 우르에게서 가나안에 와서 살았고, 이삭의 시대를 지나 야곱의 때까지 계속 가나안에서 살았다. 야곱은 잠시나마 아브라함의 영역을 벗어나 살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요셉으로 인하여 야곱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은 애굽에 가게 되어 결과적 약속의 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야웨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 결국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다시 가나안으로 이끄셨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여호수아서에 와서야 최종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그러니 여호수아는 신명기와 배타적으로 연결되는 책이라 할 수 없다.
나가는 말
여기까지 여호수아와 오경의 전체적인 연관성에 대하여 아주 간략하게 알아 보았다. 이 글의 제목은 ‘여호수아와 신명기’이지만 여호수아가 신명기적 역사서의 일부로서 반드시 신명기적이기만 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이 글을 마지막에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