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야 한다
배워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신학 공부를 시작한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배움을 거부하곤 한다. 이게 무슨 영문인가? 한 번 들어 보라.
나는 박사 과정 코스웍을 하는 동안 교육학 전문가인 셰리 레이놀즈(Sherrie Reynolds) 교수가 가르친 교육학 수업을 여름학기 과정으로 수강한 적이 있다. 내가 속한 신학교의 토니 크레이븐(Toni Craven) 교수와 팀티칭을 했던 수업이어서 수강을 했는데, 이 수업의 교과서 첫 부분에 보면 아래와 같은 글귀가 있다.
“변화를 거부한다고 과거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미래를 잃을 뿐이다.”
위 문구는 레이놀즈 교수와 크레이븐 교수가 함께 쓴 책 Higher Education Preconceived의 2쪽에 경구처럼 소개된 글귀이다. 인용 본문은 Kathleen Norris의 Dakota: A Spiritual Geography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에 수록되어 있다.
위 글귀는 이 책의 핵심이며, 이 수업에서 내가 이 수업을 통해 배웠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배움은 반드시 변화를 수반하는 활동이어야 한다.
내가 신학 공부를 시작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조언을 ‘변화’라는 주제로 시작하는 이유는 ‘신앙이 돈독한 사람’일수록 일반적으로 변화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학교에 입학한 사람이든 아니면 개인적인 이유로 보다 전문적인 신학의 세계에 입문하려는 사람이든 신학을 배운다는 것은 변화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굳이 신학을 공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내가’ 지금까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체득된 ‘예수 믿는 법’ 혹은 ‘신앙 생활 제대로 하는 법’이 전혀 문제가 없고 신학교에서는 그저 ‘내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는 자세로 신학을 배우려 한다면 결국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신학을 시작하는 분들이 무엇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는 단지 새로 구입한 가전 제품의 성능을 알기 위해 메뉴얼을 익히는 정도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신학 공부는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념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릴 수 있으며, 정체성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파급력도 있다. 그리고 변화가 큰 만큼 고통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해 배움과 변화를 거부한다. 그렇게 되면 단지 졸업장을 따고 목회자가 될 자격을 얻기 위해 학교를 다니게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배우지 않는 다는 말이다. 갑자기 찾아온 변화에 당황하여 거부하는 심리적 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이해는 되지만, 냉정히 말해서 지도자의 자리에 설 신학생에게 이러한 태도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자기 교회에서 배운 제한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어떤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그들을 지도한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마땅히 사고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워야 하며 배움에 따른 변화를 감당해야만 한다.
도대체 뭘 배우길래?
에모리의 모 교수는 신학을 하는 것이 소싯적에는 ‘저주’처럼 느껴졌었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깊이 공감했다. 신학은 교회에서 배웠던 것과 다른 지식이 많았고 그중 많은 내용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니 내 사상이 이상해지는 것처럼 느껴졌고 지금까지 함께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들과 내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될 것 같아 두려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 교수가 한 도발적 발언에 깊이 공감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학교에서는 무엇을 배우는 것일까? 여기에 모든 주제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전공한 성서학(구약)을 기준으로 다른 과목에도 광범위하게 적용될 만한 것 한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신학은 ‘학문’이다. 학문은 이성에 기반한다. 당연하고 단순한 원리 같겠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교회와, 신앙과, 성경 등을 ‘이성적’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배우는 ‘이성적’ 신학은 매우 생소하게 느껴지며 삶에 큰 변화를 야기하곤 한다.
신학을 하기 이전에 우리 모두는 성경을 신앙 생활을 잘 하기 위한 지침서로,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해왔다. 하지만 학문으로서의 신학은(특히 성서학은) 성경을 고대의 문헌으로 접근하며, 철저히 이성적으로 그것을 분석하고 그 분석의 과정과 결과를 존중한다. 내가 이 블로그에 게시한 대부분의 글들이 어느 정도 그러한 분석이 무엇인지를 보여 줄 수 있으니 참고해 보기 바란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일반 성도들은 1장 1절에 기록된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글귀에 근거하여 ‘그렇다’라고 답할 것이다. 일반 성도들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일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전도서 1장 1절이 솔로몬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이 글귀를 문자주의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이 문서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 특징과, 현존하는 사본들의 역사와, 내포되어 있는 사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대다수의 학자들은 전도서를 기원전 3세기(톨레미 왕조, 헬라 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소수의 학자들이 그보다 더 이르게 보기는 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기원전 4세기~5세기경(페르시아 시대)으로 기록 연대를 추정한다. 다시 말해서 학계에서는 전도서가 기원전 10세기의 인물인 솔로몬의 저작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는 말이다(자세한 이야기는 이 포스트를 보라).
이러한 견해 차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신성한 가치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만을 기록한 문서’이기 때문이라고 배우고 믿어온 사람에게 그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학자들의 견해는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이 신학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게 되는 고민이다.
지금까지 ‘이성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이성적으로 재검토하게 되고 그 결과 내가 알고, 믿고, 신봉했던 많은 것들을 포기하거나 상당 부분 수정하게 된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매우 많은 사람들이 신학 교육이 일으키는 이 혼란한 상황(즉 변화)을 견디지 못하며, 그냥 피해가기 위해 배움과 변화에 정면으로 부딪히기보다 외면하고 무시한다.
신학은 학문적으로도 난이도가 높은 학문이긴 하지만 신학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사고 방식에서 부터 일어나는 근본적인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어려운 게 뭔지는 대충 알았으니 성공적으로 배움을 이어가기 위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지 알아 볼 차례다. 이 이야기는 다음 포스트에서 알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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