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번역 시리즈(7):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4)

Excerpt

전도서 7장 1-4절은 지혜자가 당장의 유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데, 이를 은유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지혜자의 마음이 초상집에 있고 ‘희락의 집’에 있지 않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개역한글 성경은 이 부분을 ‘혼인집’으로 표현했다. 이 번역의 장점과 한계는 무엇인지 알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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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Eyer님의 사진

지혜자의 마음

전도서에 따르면 지혜자는 지금 당장의 유희와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며 필요하다면 고통도 감수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코헬렛은 전 7: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개역개정, 전 7:14

그런데 여기에 ‘혼인집’으로 번역된 부분의 원문에는 ‘혼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걸까?

희락의 집

본문에 ‘혼인집’으로 번역된 부분의 원문은 בית שמחה(베트-심하)이며, שמחה(심하)는 일반적으로  ‘즐거움’, ‘희락’ 등의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בית שמחה(베트-심하)는 직역하면 ‘희락의 집’이다. 개역개정의 ‘혼인집’이란 번역은 ‘희락의 집’의 의역이다. 개역개정이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2절에서 슬픔과 기쁨을 대조하기 위해 ‘초상집’과 ‘잔치집’이란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4절의 ‘희락의 집’은 맥락상 2절의 ‘잔치집’과 같다고 볼 수 있고, 흔히 잔치를 벌이는 집은 혼사가 있는 집이기 때문에  בית שמחה(희락의 집)를 ‘혼인집’으로 의역한 것은 이해할만 하다. 나아가 שמחה(즐거움, 희락)는 구약성경의 다른 본문에서도 종종 혼인과 관련된 기쁨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일례로 개역개정의 렘 7:34, 16:9, 25:10은 ‘즐거워하는(שמחה) 소리’를 혼인 잔치의 소리(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연관지어 사용했으며, 아 3:11에서는 ‘혼인날’을 묘사하는 단어로 שמחה를 사용하기도 했다.

렘 7:34 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설명: 즐거워하는 소리(심하) = 신랑, 신부의 소리)

렘 16:9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 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 (설명: 위와 같음)

렘 25:10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설명: 위와 같음)

아 3:11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직역: 기쁨의 날)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설명: ‘혼인날’=’기쁨(심하)의 날’; 개역개정의 구문과는 달리 원문은 ‘혼인날 곧 기쁨의 날에’로 표현함.)

개역개정

위 구절들은 혼인날의 기쁨을 묘사하는 말로, 혹은 그와 동격의 표현으로 שמחה(즐거움, 희락)를 쓰고 있다. 따라서 개역개정의 전 7:4 번역이 בית שמחה(베트-심하)를 ‘혼인집’으로 번역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전도서 7장의 맥락에서 בית שמחה(베트-심하)שמחה는 엄밀히 혼인과 관련된 기쁨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 것은 아니다. 7장 1절에서 코헬렛은 슬픔과 기쁨을 대조하는 표현으로 ‘죽는 날’과 ‘출생하는 날’을 사용했다. 죽음과 생명을 대조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조는 2절에서 ‘초상집’과 ‘잔칫집’으로, 또 4절에서 ‘초상집’과 ‘희락의 집’으로 반복하여 나타난다. 아래를 보라.

전도서 7:1-4

보는 바와 같이 1-4절의 문맥은 슬픔과 기쁨(웃음)을 죽음과 삶에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지 ‘혼인’과 관련짓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4절의 ‘혼인집’이라는 표현은 (오역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맥락에 맞지 않는다. 문맥상 4절의 בית שמחה(베트-심하)는 ‘초상집’과 대조되는 ‘잔칫집’으로 할 수도 있겠으나 이미 2절에 ‘초상집’이 다른 히브리어 어휘로 등장했기 때문에 이 역시 적절치 않다. 따라서 7장 4절의 בית שמחה(베트-심하)는 의역을 하기보다 그냥 ‘희락의 집‘이라고 직역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7장의 슬픔과 기쁨의 대조에서 한 가지 더 고려할 부분이 있다. 전통적인 지혜 전통에서 어리석은 자들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의 유희를 즐기는 사람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그와 반대로 행하는 사람이다. 잠언 21:17의 예를 보자. 

연락(שמחה)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개역개정

위 구절에서처럼 코헬렛은 전 7:1-8에서 유희를 추구함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전도서 본문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코헬렛은 유희를 좋은 것으로 여기며, 노력하고 수고하는 것이 오히려 무익하거나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전 8:15에 따르면 코헬렛은 심지어 שמחה(유희, 연락)를 찬양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개역개정

개역개정의 전 8:15번역에서 주의할 점은 שמחה(심하)를 ‘희락’이라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나타낸다는 점이다. 개신교인들에게 ‘희략’이란 단어는 성령의 열매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여기서 코헬렛이 ‘희락’을 찬양했다는 말이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코헬렛에게 שמחה(심하)란 단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 즉 유희 혹은 연락을 뜻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전 7:1-8에서 코헬렛이 שמחה(심하)를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전통적인 지혜 사상을 대변하고 있긴 하지만 코헬렛 스스로의 생각에는 모순되는 것이다. 코헬렛은 다양한 주제에서 모순된 생각을 표출하는데 ‘유희’도 그중 하나이다. 그는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현자로서 분명 잠언이 가르치는 어리석은 자의 특징과 지혜로운 자의 특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의 경험과 합리적 추론을 통해 그는 지금 당장의 שמחה(연락 혹은 유희)가 단지 어리석은 자가 추구하는,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에게 허락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이 복합적 사고의 핵심 어휘가 바로 שמחה(심하)인데, 7장 4절의 ‘혼인집’이라는 번역은 핵심 어휘인 ‘유희’를 ‘혼인’으로 과도하게 구체적인 표현으로 국한 시키는 문제를 지니므로 직역하여 ‘유희의 집’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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