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에 대하여

Excerpt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여긴다. 그런데 복음주의라는게 뭔가? 그리고 복음주의가 아닌 것은 또 뭔가? 지금의 복음주의는 자기 생각과 신념에 맞지 않으면 잘못이라고 여기는 이념성과 편가르기의 구실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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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Catkin from Pixabay

* 복음주의는 일종의 ‘이념’이다. 이념은 무의식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는 어떤 것이다.

복음주의가 뭘까?

복음주의는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과 같이 ‘주의'(ism)라는 말로 끝난다. 즉 일종의 이념이란 것이다. 이념을 갖게 되면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것의 문제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를 문제로 여기게 된다. 이념은 합리와 논리보다 옳고 그름을 중시하며 그 판단의 근거는 당연히 이념이다. 그 이념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기 위한 노력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인 결과가 돈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치가 별로 없는 일이거나 헛된 일이라고 여겨진다. ‘왜?’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심지어 수업 시간이 ‘알바’ 시간과 겹친다는 이유로 수업 시간에 일찍 나가야 한다는 학생도 본 적이 있다. 어이 없는 발상이지만 본인은 돈을 벌기 위한 일이라면 교수가 봐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복음주의도 ‘주의'(ism)이기 때문에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복음주의는 –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 복음주의가 옳은 것이며 그것에 어떤 문제가 있을 리 없고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며 그것과 다른 것이야말로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경향을 ‘복음주의자들에게’ 심어 준다. 

신학교에서의 일화

얼마 전 모 수업에서 나는 창세기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는 구절의 ‘우리‘라는 표현이 고대 사회에서는 하늘의 거룩한 모임(divine counsel)에서 신을 모시고 서 있는 천상의 존재들(베네 엘로힘)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이 부분에 대해 어떤 학생이 수업 후에 조심히 질문을 했는데 그 학생의 질문은 이 구절이 보통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라고 해석하는데, 성서학자로서 그런 전통적 해석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나에게 어떤 질문은 그 질문의 답보다 질문 자체가 갖는 의미가 더 크다. 사람들은 질문을 통해 무엇이 당연하고 무엇이 당연하지 않은지에 대한 자신의 이념성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위 언급한 학생은 알고자 하는 마음과 궁금증에서 순수하게 질문을 했다. 이 학생은 ‘복음주의’라는 이념을 극복하고 더 합리적인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 나는 이런 이런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보통은 자기가 알고 있던 것에 반하는 내용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이념의 힘이고 역할이다. 자신의 이념성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생각을 지키는 데에만 치중한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생각이라기보다 이념이라는 틀 속에서 형성된 남의 생각이다.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학문적 설명이 갖는 논리와 합리적 타당성을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 ‘복음주의’라는 이념에서 논리와 합리는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판단 기준에 있어 복음주의 이념은 이성보다 우위에 있다. ‘복음주의’는 이념이다. 신학생들을 비롯한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신앙이 강한 만큼 이념성도 강하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교수들은 종종 가르치는 일에 큰 벽을 만나게 된다. 위에 언급한 학생과는 달리 어떤 학생들은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학생들은 복음주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교수와 대립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나의 경우 어떤 학생으로부터 “왜 그런 걸 가르치느냐?”라는 ‘질문’도 받은 적이 있다.

복음주의의 윤리적 문제

학생이 교수에게 궁금한 것이나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을 질문하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고 무엇을 가르칠 수 없는지를 언급하는 것은 학생으로서의 선을 넘은 것이다. 하지만 ‘복음주의’의 이름으로 어떤 학생들은 그 선을 과감하게 넘어 버린다. 그만큼 ‘이념’은 보편적인 윤리의식을 잠재우기도 한다.

과거 전 세계는 이념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까지 치렀다. 그 처참한 역사의 흔적이 한반도에는 여전히 큰 상처로 남아 있다. 이렇게 이념은 비윤리적 행위를 감내하면서라도 지켜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념을 희생할 수 없다면 윤리적인 사람이 되기 어렵다.

문제는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이 이념을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옮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성경이라고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성경의 의미는 독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다양한 교단도 존재하고 교파도 나뉘어 지는 것이다. 성경을 근거로 자신이 복음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해석만 옳다고 믿는 오류에 빠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생각해 보자. 성경을 근거로 어떤 이는 이혼을 금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어떤 이는 방언을 금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어떤 이는 피임을 금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어떤 이는 혼전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어떤 이는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 모두는 자신이 ‘성경’을 따르는 ‘성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해석 혹은 자기가 받아들인 해석을 신의 뜻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해석을 따르지 않는 것은 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 여긴다.

특정 해석이나 신념을 신의 뜻과 동일시하면서도 그것을 객관적으로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될 뿐이다. 원수마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이념 앞에서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복음주의가 제정한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거침 없이 비판한다.

나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을 수 없이 많이 만나 봤는데, 그들 중 사랑, 용서, 포용의 가치를 자기 해석과 신념보다 중시하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성경은 분명 사랑, 용서, 포용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복음주의의 율법은 그 무엇보다 중요시 된다. 하지만 자신의 이념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이념의 렌즈를 벗어 버리니 비로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주의

Luther
Luther: Image by Sharon Ang from Pixabay

나는 신학을 공부해 오면서 지금까지 만나 본 많은 학자들 중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부르거나 복음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은 본 적이 있지만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자유주의는 어떤 정해진 이념도 특정 집단도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소속감을 줄 수 있지 않다. 내가 본 어떤 학자들도 ‘자유주의’로 무장하여 ‘복음주의’를 무너뜨리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더 나은 해석이 무엇인지 격렬하게 논쟁하며 서로 경쟁한다.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 존중받는 곳이 학문의 장이다. 

자유주의란 표현은 주로 복음주의자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악마화할 때 쓰이고 있다. 자칭 복음주의자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 중 어느 정도 자기가 받아들일 수 있는 허용범위를 나름 대로 두고, 그 범위에서 벗어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로 분류한다. 그런데 이것은 개신교 역사에 대해 무지한 행동이며, 어쩌면 자기 뿌리를 부정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나의 경험에 비춰 보자면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라고 낙인 찍는 사람들은 성서학에서 ‘역사비평방법론’에 기초한 연구를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이 방법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방법론이 태동하게 된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주의’의 원류인 루터의 기독교 개혁이라는 점이다.

루터는 오직 성경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가톨릭 교회가 제정한 교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루터는 ‘교리적 읽기’를 탈피하여 그 본문의 역사적 의미에 접근하려고 했고, 그러기 위해 본문의 역사와 저자의 의도 등에 집중했다(종교 개혁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해 보세요: “오직 성경”: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중세시대까지의 성경 해석은 소위 ‘영적 해석’이라고 하는데, 방법론상 주로 알레고리나 모형론(typology)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이런 류의 해석은 교회의 권위로 의미를 강요하는 것이지 객관적 타당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냥 교회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 된다. 그랬던 시대에 루터는 당연시되던 교회의 가르침과는 다른, 보다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성서학은 그 방법론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고 있으며 끊임 없이 더 나은 해석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복음주의가 자유주의라는 말을 만들어서 학자들을 정죄하는 용도로 쓰는 행위는 중세 가톨릭 교회가 루터의 해석을 교회의 권위로 부정하고 정죄했던 역사를 답습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신교는 ‘개혁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잃었고 ‘복음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중세 가톨릭처럼 권력화 되었다. 성서학의 발전은 루터가 주목했던 ‘본문’ 그 자체에 대한 분석과 의미 발견을 위한 노력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미 제도화되어 버린 개신교는 더 나은 해석을 찾으려는 노력 대신 중세 가톨릭 교회가 가졌던 자세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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