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의 변론

Excerpt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전통적 성역할을 정당화하는 본문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이 본문은 생각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 글은 그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temptation, Adam and Eve
Jebulon, CC0, via Wikimedia Commons

구약성경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작성되어 그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만 한 여러 가지 단서들을 제공한다. 

잠언의 교훈적 가르침들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화라는 고대 근동의 교훈적 장르의 전형적인 화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대화에서 가르치는 자–‘아버지’–는 여성을 ‘대상화’하여 젊은 이성애자 남성(아들)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가령 흔히 ‘음녀’라고 알려진 잠언(2:16, 5:3, 7:5)의 한 여성은 잠언의 교훈적 대화에서 젊은 이성애자 남성(아들)이 음행으로 대표되는 갖가지 죄에 빠지지 말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활용된 존재이다. (사실 ‘음녀’는 문자적으로 ‘낯선 여인’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음녀’는 지나친 의역이다.)

또 다른 여성으로 의인화된 지혜(호크마)는 ‘낯선 연인’과 대조되는 존재로 ‘아들들’이 반드시 습득해야 할 지혜와 지혜로운 삶의 전형으로 활용되었다. 이 두 여성은 젋은 이성애자 남성들에게 매력을 어필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들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존재 가치를 지니며 그 존재 자체로 이미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한다.

아마도 창세기 2-3장이 보여주는 하와의 부정적인 모습이야말로 가장 확실히 성경의 가부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약성경의 본문일 것이다. 창세기의 이 이야기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먼저 등장할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의 독자들은 아담이 아닌 하와가 인류 타락의 원흉이며 지상 낙원 에덴에서 아담이 쫓겨나게 만든 주범이라고 이해한다. 아울러서 하와는 뙤약볕에서 하루 종일 고생해야만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에 처하게 한 장본인이며, 해산의 고통을 자초하였고, 그 큰 죄를 지은 이상 남성을 주도해서는 안되고 늘 부수적 역할만 해야한다는 가부장적 사고를 합리화하게 해 준 죄 많은 여성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와는 과연 그렇게 철저히 악하게 받아들여져야만 할까? 가부장적 가치관이 만들어내고 강화해 온 이 모든 부정적 하와의 이미지들은 부분적으로라도 개선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창세기 2-3장의 기록을 보면 그런 부정적 인식이 독자의 오해에서만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창세기 2-3장의 최종 형태는 분명 가부장적 관점에서 하와의 문제를 꼬집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와의 입장에서도 할 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 몇 가지 하와의 항변을 들어보자. (참고: Carol Meyers, “Eve,” in Women in Scripture.)

아담은 어디 있었나?

하와가 뱀과 이야기 하며 선악과를 탐하고 있을 때 아담은 어디있었나? 하와는 과연 ‘혼자’ 돌아다니다가 뱀의 유혹에 빠져 ‘혼자’ ‘단독으로’ 죄악을 저지른 것인가?

  1. 우선 창세기 3:6을 보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2. 창세기 3:6은 분명히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었다”고 말한다. 하와가 뱀과 이야기하고 금단의 열매를 탐하게 되고 결국 그 열매를 먹게 되기까지 아담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3:6에 따르면 아담음 하와와 ‘함께’있었다. 창세기 3장은 하와가 아담 없이 나무에 홀로 접근했다거나 뱀에게 말을 걸었다거나 하는 내용은 없다. 비록 하와와 뱀과의 대화에서 아담은 침묵하고 있으나 홀로 떨어져 있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하와 옆에서 뱀의 말을 듣고 있었고 하와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설득을 당하여 하와가 주는 열매를 순순히 받아 먹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죽을지도 모른다?

하와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축소하였나?

  1. 하와의 대답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왜곡하거나 축소시킨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의 원문은 영문으로 번역하면 “or you shall die”이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죽을까 한다”라고 표현하여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하와는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너는 죽을 것이다”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부정확한 번역 때문에 한국의 독자들만 이 부분을 오해하고 있다. “죽을까 한다”라는 표현은 사실 “죽을까 염려한다”라는 의미에 가깝다.
  2. 영어권 독자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하나님은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한 적이 없고 먹지만 말라고 했기 때문에 하와가 하나님 말씀을 변형 시켰다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비난이다. 왜냐하면 먹지 않기 위해서는 만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매튜 헨리와 같이 유명한 보수적인 학자 조차도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만지지도 말라고 말한 부분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말한다.

뱀은 과연 사탄의 현현인가?

이 질문은 “이브의 변론”이라는 이 글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어 보일 수 있으나 이브가 “사탄”과 대화를 했다는 오해를 종식시킨다는 점에서 연관이 좀 있다.

  1. 뱀을 소개하는 성경 구절은 창3:1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2. “간교하더라”에 대당하는 히브리말은 ערום (아룸)으로 주로 지혜문헌에서 나타나는 어휘이며 의미는 “분별력있는” (prudent), “똑똑한” (clever)이고, 어리석거나 단순한 사고를 하는 사람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3. 따라서 간교하다라는 “번역”은 일종의 해석으로 창세기 3장 자체의 “원자료”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서 와전 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4. 단순하고 어리석지 않고 오히려 똑똑한 뱀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는 날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열매를 먹으면 독약을 먹고 죽는 것처럼 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알아 분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뱀은 단지 진실을 밝히려고 하고 있을 뿐이다.
  5.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숨기려고 사실과 다른 말을 하시지만 뱀은 그 숨긴 것을 밝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이 사건을 두고 뱀을 ‘사탄’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선악과는 위험한가?

선악과는 과연 그렇게 위함한 열매인가? 선악과는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마녀가 백설공주에 주려 했던 독사과처럼 그 자체로 독성이 있거나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해로운 것인가?

  1. 선악과 (나무)의 원문을 영어로 직역을 해 보면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다. 즉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이다. 이 나무는 부도덕하고 악한 인간의 타락한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2. 이 나무는 말 그대로 아담과 하와에게 일종의 “지식”을 주었고, 그 지식은 절대 알아서는 안되었을 위험한 지식이었다기 보다 오히려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에 관련된 지식이었다.
  3. 선악과를 먹고 즉시 나타난 효과는 아담과 하와가 옷을 입지 않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이는 동물과 명실공히 차별화된 인간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게 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선악과를 먹음으로 나타난 다른 효과는 인간이 노동을 해야 살 수 있는 환경에 처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로지 주어진 것만을 아무런 노동이 없이 먹고 마실 수 있는 환경에서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얻고 또 그 댓가로 잉여산물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부의 축적이 가능해진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이를 따라 빈부의 격차가 생기게 되며, 인간관계와 사회 전반에 부정 부패와 부조리한 사건들이 부를 획득하기 위해 벌어지게 됨을 뜻하기도 한다. 즉, 선악과 사건은 현재 인간 문화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면에 대한 출발점을 상징적인 이야기를 통해 표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Shaking Heaven and Earth라는 책의 뉴섬의 글 “Genesis 2-3 and 1 Enoch 6-16: Two Myths of Origin and Their Ethical Implications”을 보라)

하와는 죄인인가?

  1. 하와는 궁극적으로 죄인이지만 인류의 모든 죄를 탄생시킨 극악무도하고 경솔한 인간으로 치부될 수는 없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라는 명칭만 보아도 창세기 3장은 이스라엘의 지혜전통에 깊은 관련이 있다. 특별히 선과 악을 분별하여 안다는 것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되었던 사건과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지식’이나 ‘선악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들이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간의 자질이다. 
  2. 아담이 이 사건에서 침묵하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 것에 반해 하와는 3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결국 지식을 탐하였다는 점에서 인간 문화 탄생의 시발점이 되었다. 고대의 구전 전승과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진 문서 전승들에서 하와는 아마도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졌었을 것이다. 
  3. 실제로 토빗기 8:6은 이브를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현존하는 문서이다. 토빗 전승은 성경의 많은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에 대한 이야기가 현존하는 창세기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전승도 존재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4. 지혜문헌에서 지혜와 여성을 연결시키는 것은 이런 전승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잠언의 지혜는 종종 여성으로 의인화 되어 나오는데 이 지혜 여인은 잠언 8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바로 그 때 이미 존재하여 하나님의 딸로 그 앞에서 즐거워하며 창조를 목도하였고 창조 후에는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인간 사이에 거하였다고 증거하고 있다. 
  5. 하와가 ‘지식’을 탐하였던 사실은 이런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나가는 말

성경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쓰여졌고 가부장적 질서를 확립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할 때가 많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 단순한 책은 아니다. 창세기 3장은 비록 하와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그리며 가부장적 질서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동시에 창세기 3장은 감출 수 없는 “지혜 여인”으로서 하와의 긍정적 단면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은연중에 창세기 3장의 하와를 필요 이상으로 혹은 본문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악하게 생각해 왔다. 이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하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3 thoughts on “하와의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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