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 사건은 애굽에서 바로의 압제 아래 고통받던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사건이라고 흔히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을 꼼꼼히 살펴 보면 이 사건이 정말 그런 성격의 사건인가하고 의아해 지는 내용들이 있다.
먼저 출애굽기 5장에서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만나 한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학대를 그치고 그들을 영구히 내보내라는 직설적인 통보가 아니라 바로를 속이고 몰래 빠져나가 보려는 듯한 일종의 꼼수로 보인다.
출 5: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개역개정)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사흘길쯤 가서 예배만 드리고 다시 돌아올 것처럼 이야기한다. 애굽을 영영 떠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광야에서 야웨께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야웨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벌을 내리실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세와 아론의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사흘길을 나가 광야에서 예배만 드리고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다. 또 자신들이 애굽에 머물러 있을 때 정작 재앙을 만나게 될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애굽인들이라는 사실을 모세와 아론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만나 이스라엘 민족이 야웨께 예배하고 돌아오게 해 달라고 요청한 후 바로는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시는 예배를 드리네 마네 하는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이스라엘 민족에게 부과된 노역의 강도를 더 높였다. 야웨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자 모세를 애굽에 돌려보낸 것인데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이다.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비난했다. 이스라엘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던 모세는 자기가 바로를 만난 후에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고 오히려 꼬여 버리자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탄원한다.
출 5: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개역개정)
모세의 탄원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바로는 이스라엘을 더 학대했다. 그러나 야웨는 처음부터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야웨는 손쉽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실 생각이 없었다. 비록 야웨께서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하실 것이었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야웨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내보내지 않게 하실 계획을 처음부터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는 대가로 여러 재앙을 애굽에 내리실 계획이었다. 나아가서 바로가 이스라엘을 더 괴롭힌 대가로 애굽은 국가적 재앙을 경험하고 바로와 그의 군대는 물에 수장되어 죽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하실 생각이었다. 그냥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도 있었던 야웨께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이끌어 가신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출애굽 사건이 꼬이고 꼬여 그 꼬임이 극에 달했던 홍해 앞에서 밝혀진다. 출애굽기 14장 4절에 따르면 야웨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 해방하신 이유는 애굽 사람들이 야웨를 야웨인 줄로 알게 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다.
출 14: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개역개정)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는 과정에서 중요시 했던 부분은 야웨의 힘과 위엄을 세상에 떨치며 야웨가 야웨인 줄 알게 하는 것과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만일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굳이 홍해로 길을 돌이켜 애굽 군대를 맞닥뜨릴 이유도 없었다. 야웨께서는 애굽을 떠나 잘 행진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행로를 변경하여 돌이켜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출 14: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개역개정)
우리는 이스라엘이 어떤 경로로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가야 했던 가나안은 바다를 통해 가야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야웨의 명령을 따라 가던 길을 돌이켜 굳이 바닷가에 장막을 쳤고 야웨의 의도에 따라 이스라엘은 애굽 군대에게 따라잡혀 꼼짝 없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어이 없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정확히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바다가 갈라지며 벽이 되는 것을 목도했다. 이 사건은 그들이 섬겨야 할 신이 바로 ‘야웨’라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신이라는 것을 알리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애굽의 입장은 정반대이지만 야웨에 대한 경험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그들은 분명히 독안에 든 쥐같은 신세인 이스라엘을 당장 처단할 기회를 잡았으나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신에게 대항한 대가는 마른 땅 한복판인 줄 알았던 곳에 갑자기 바닷물이 들이닥쳐 수장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죽음의 바다를 눈앞에 두고 이게 바로 야웨의 힘이구나를 느꼈을 것이다. 결국 출애굽 기사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구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야웨께서 당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영광을 얻으시려는 것이었다.
이 모든 사건이 종료된 후에 모세의 노래가 출애굽기 15장에 나온다. 거기서 모세는 야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출 15:3 야웨는 ‘전쟁의 사람’이시다. 야웨가 그의 이름이시다.
(사역)(*’전쟁의 사람’은 개역개정판에서 ‘용사'(warrior)라고 번역되었다. ‘전쟁의 사람’은 ‘이쉬 밀하마’라는 히브리어 표현의 직역이며 ‘이쉬’는 ‘사람’ 혹은 ‘남자’를, ‘밀하마’는 전쟁’을 뜻한다.)
맞는 말이다. 아무 힘이 없었던 이스라엘은 전쟁을 하지 않았다. 전쟁은 야웨 혼자 했고, 엄청난 승리를 쟁취했다. 그 목적은 야웨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의 이름이 야웨인 줄 알게 하는 것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은 국가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유지하고 확장해 나가는 기본 방식이였고, 누구나 자기가 섬기는 신이 전쟁에 능한 신이길 바랐다. 그리고 신이 강하다는 것은 자랑거리였지 문제가 될 부분은 아니였다. 출애굽 사건 속 야웨에 대한 저자의 이런 묘사는 그러한 고대 사회의 신관과 정서를 드러낸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보편적으로 전쟁을 싫어한다. 죽고 죽이는 방법 대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신에 대한 보편 정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점검해 봐야 할 것이 있다. 만일 고대인들의 신에 대한 묘사가 저자가 속했던 시대적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우리가 사용하는 신에 대한 묘사도 사실은 우리 시대가 기대하는 신의 모습일 뿐, 진짜 신의 모습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