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이전 포스팅 한 글들 중에 ‘비극의 교훈(1) (2)‘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인의 윤리적 성경읽기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나는 20세기말까지 성경(해석)을 근거로 자행되어 온 기독교의 타자에 대한 폭력의 정당화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 성경 본문 중에서도 단연코 가장 흔히 활용된 것이 바로 여호수아이다. 여호수아는 신의 이름으로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 사건들로 가득하며, 그중에서도 소위 ‘진멸법’의 시행이 대표적인 예이다. 오늘은 기독교인의 윤리 의식에 큰 영향을 끼쳐 왔던 이 무서운 법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석해 보고, 이 법이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자.
II. 대표적 진멸법 관련 구절과 일관성 문제
‘진멸법’이란 용어는 생소한 말일 수 있지만 그 내용은 그렇지 않다. ‘진멸법’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명령으로, 가나안의 그 누구와 어떤 언약도 맺지 말고, 가나안 사람이라면 누구도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반드시 모두 죽이라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이 법은 신명기에서 주어졌으며, 신명기에서 요단 동편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이미 실행되었고, 나아가 여호수아서에서 요단 강을 건너가 요단 서편 땅에서 실행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 법의 내용과 실제 시행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1. 대표 구절
먼저 대표 구절들을 보고, 그 법의 내용과 실행에 있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 보자.
신명기의 진멸법
신 7: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하하렘 타하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신 20: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하하렘 타하리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18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개역개정
신명기에서의 진멸법 시행
신 3:6 우리가 헤스본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 성읍(바산의 60개 성읍)들을 멸망시키되(나하렘) 각 성읍의 남녀와 유아를 멸망시켰으나(하하렘) 7 다만 모든 가축과 그 성읍들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개역개정
여호수아서의 진멸법 시행
수 6:21 그 성(여리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바야하리무)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개역개정(원문에는 ‘멸하니라’에 해당하는 동사가 없음)
2. 구체적 내용에 있어 일관성 결여의 문제
첫째, 오경에서 ‘진멸법’은 오직 신명기에만 등장한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모두 ‘율법'(토라)을 포함하는 책들이지만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명령하는 ‘진멸법’은 오직 신명기에만 나온다. 특히 출애굽기의 ‘계약법전'(Covenant Code, 20:22-23:19)과 신명기법전(12-20)은 같은 법조항들을 담고 있는데(물론 세부 사항에서 차이가 있다), 계약법전에서는 ‘진멸법’이 주어지지 않은 반면, 신명기법전에는 진멸 명령이 주어진다.
둘째, 진멸법에서 구체적인 진멸의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우선 신명기 자체에서 실행된 진멸법(위 3:6을 보라)의 경우 사람은 모두 죽였다고 기록하지만 가축을 포함한 다른 전리품들의 경우 죽이지 않고 이스라엘의 소유로 삼았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신명기 13장 15-17절에 따르면 진멸의 대상은 개인의 재산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축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17절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심 같이 너를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
개역개정
물론 신명기 13장은 가나안을 점령하는 과정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 그후에 일어날 사건,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 내부에서 배교가 일어나는 경우 그 성읍을 진멸하라는 내용이라 가나안 정복시 주어진 진멸법과 다르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 13:15-17에 역시 가나안 점령시 주어진 ‘진멸법’과 같은 어휘인 ‘헤렘’이란 단어가 쓰였고, 그 목적도 진멸법의 본래 취지인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혹은 가나안의 종교와 풍습)을 따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로, 가나안 정복시 주어진 진멸법과 정복 후 실행할 진멸법은 둘 다 같다(위 20:18을 보라). 따라서 신 13의 진멸법을 특수한 진멸법으로 볼 필요는 없다. 여호수아서의 아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이유 역시 신13장에서 명령한 것처럼 진멸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온전히 바친 물건’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간은 신 13:15-17의 내용대로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의 모든 재산까지 돌에 맞게 되었다. 이는 ‘헤렘법’이 가축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다 죽이고 전리품도 취하지 말아야 함을 뜻한다. 요단 동편을 점령할 때(신 3:6) 이스라엘은 전리품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신 13과 상충된다. 나아가 여리고 성에서 라합과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준 것 역시 진멸법에서 명령한 바 불쌍히 여기지 말고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말 그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셨다.
셋째,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지켜야 했던 ‘헤렘법’은 단순히 보면 가나안의 모든 사람을 죽여야하는 것이지만, 성경을 더 종합적으로 살펴 보면 반드시 그렇게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야웨께서는 ‘의도적으로’ 가나안의 모든 사람을 쫓아내지 않으실 것이라고 예고하시기도 했기 때문이며, 여호수아를 포함한 많은 본문에서 오랜 동안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아 갔기 때문이다. 예컨대 삿2:3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개역개정
가나안의 모든 사람을 다 죽여야 한다는 명령과는 달리 이 구절에서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헤렘법’을 진멸법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그 목적이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와 문화적 악영향으로부터 피하기 위함인데, 위 구절은 그와 정 반대로 오히려 그들이 이스라엘이 정말 하나님을 잘 따르는지 시험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예고한다.
나아가 신명기의 명령은 외부인에 대한 배타적 정서만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포용과 환대의 명령도 포함하고 있다. 아래 구절을 보라
신 10: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개역개정
신명기의 헤렘법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포함한 ‘외부인’을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위험 요소로 여긴다(물론 다른 의미도 있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인들을 공동체 내부로 수용하고 환대하는 것은 ‘진멸법’과 상충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헤렘법’은 단순히 진멸이나 아니냐로 판단할 수 있는 법이 아니란 말이 된다.
헤렘법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종교적 순수성에 위협이 되는 모든 요소를 완전히 없애야만 한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율법적 근거는 십계명에도 등장한다. 신명기 5장에 기록된 십계명 중 다음 구절을 보라.
신 5:17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살인하지 말라)(=로 티르차)
개역개정(참고: 위 계명은 신명기와 출애굽기에서 모두 정확하게 같은 어휘로 쓰여졌다. 한글 번역에서는 신명기와 출애굽기가 ‘말지니라’와 ‘말라’로 다르지만 원문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살인’ 혹은 ‘살생’을 금하셨으며, 외부인인 ‘나그네’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여기서 나그네는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공동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존재로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으로서의 나그네가 아니라 거기에 상주하여 살며 그 인구가 크게 불어난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것은 ‘외부인’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이런 부분을 차치하고 단순히 ‘헤렘법’을 ‘진멸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3. ‘진멸’ 혹은 ‘헤렘’이란 단어의 의미의 문제
위에 대표 구절로 제시한 본문에서 ‘진멸’ 혹은 ‘멸망’이란 말로 번역된 모든 곳에는 ‘하람'(ḥrm)이란 동사가 활용된 형태가 나타나며 이 동사의 명사형이 곧 ‘헤렘’이다. 그런 이유로 ‘진멸법’은 곧 ‘헤렘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하람’ 동사는 표면적으로는 죽이라는 뜻이 아니라 ‘금하다'(put under a ban)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이 용어는 진멸법의 경우를 제외하면 주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것을 ‘금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종종 ‘온전히 바쳐진 것’ 혹은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번역이 된다. 아래 구절들을 보라.
레 27:21 희년이 되어서 그 밭이 돌아오게 될 때에는 여호와께 바친(하헤렘) 성물이 되어 영영히 드린 땅과 같이 제사장의 기업이 될 것이며
레 27:28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헤렘 아쉐르 야하림)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헤렘)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29 온전히 바쳐진(헤렘 아쉐르 야하림)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개역개정
위 구절들의 경우 가나안 정복과 관계 없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 즉 사람이 손대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을 표현하는 말로 ‘헤렘’ 혹은 ‘하람’이 쓰였으며, 그 자체로는 ‘죽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아가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이야기에서도 그 성에 사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쳤다’라는 말을 위해 ‘하람’ 혹은 ‘헤렘’이 쓰였다(6:21).
수 6:21 그리고 그들이 성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남자로부터 여자까지, 아이로부터 노인까지, 그리고 소와 양과 나귀까지 칼날로 온전히 바쳤다(바야하리무).
사역; 개역개정에서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칼날로 멸하니라’라고 번역했다. 원문에서는 ‘바치다'(하람) 외에 ‘멸하다’라는 동사가 등장하지 않아 사역을 제공했다.
여리고 성에서 아간이 범한 죄는 죽이지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기보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할 것에 손을 댔다는 데에 있다. 물론 바치는 행위는 결국 칼을 쓰는 것이지만 ‘하람’ 혹은 ‘헤렘’을 쓴 것은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것이 목적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여호수아서 7장 1절은 아간의 죄에 대해 ‘진멸하지 않아서’라고 표현하지 않고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했다고 묘사한다.
수 7:1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헤렘)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헤렘)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개역개정
위 구절들이 보여 주는 것처럼 ‘헤렘’ 혹은 ‘하람’은 죽이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표현이라기보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사람이 더이상 손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물론 ‘온전히 바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그 생명을 취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에 ‘죽임’과 관련이 있지만 죽이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바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III. 나가는 말
여호수아서를 비롯한 신명기적역사서의 저자와 편집자는 성경에 존재하는 헤렘법을 둘러싼 다양한 불일치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을리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이런 문서를 생산해 냈을까? 여호수아의 저자/편집자는 그들의 독자로 하여금 과연 이스라엘의 ‘진멸’ 행위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행동 기준으로 삼기를 바랐을까? 여호수아서의 진멸 행위를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까? 늘 그렇지만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적어도 헤렘의 1차적 의미는 온전히 바치는 것에 있으며 죽이는 행위 자체에 있지 않다. (2) 헤렘 관련 본문들과 그와 연관된 다른 법들을 살펴 보면 헤렘법을 단순히 ‘진멸법’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3) 따라서 기독교가 헤렘법과 여호수아서의 정복 관련 서사를 기반으로 행해왔던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 행위는 결코 ‘정답’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