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

Excerpt

이사야서는 이사야라는 고대의 선지자가 쓴 예언서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사야가 이사야서를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첫 번째 글에 이어 이 글에서는 이사야서의 메세지와 인물 이사야가 처한 시대적 정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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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구조와 저작권 문제 (2)

1. 제2이사야는 전통적으로 40-55라고 여겨졌으나 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원이사야에 포함된다고 여겼던 34-35도 지금은 제2이사야로 보는 추세이다. 제2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한 유다의 회복을 주로 예언하며 예언의 지리적 배경은 주로 바벨론이다. 제2이사야는 심지어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너희는 바빌론에서 나오너라.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서 도망하여라. 그리고 ‘주님께서 그의 종 야곱을 속량하셨다’하고, 즐겁게 소리를 높여서 알려라. 이 소식이 땅 끝까지 미치도록 들려주어라.” (사 48:20, 새번역)

2. 제2이사야의 하나님은 용서와 구원의 하나님이며 위로자이시다. 회복의 말씀은 위 48:20이 보여주듯이 이집트로부터의 탈출과 유사한 개념으로 소개되며 탈출 명령의 실행으로 현실화된다. 그러나 과연 이 말씀이 웃시야로부터 히스기야의 시대까지 살았던 유다의 백성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명령과 더불어 나오는 모든 용서와 구원과 회복의 메세지는 포로 말기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3. 제3이사야는 전통적으로 56-66라고 보았으나–제2이사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과거에 원이사야에 포함된다고 여겼던 24-27도 요즘은 제3이사야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보는 추세이다. 

제3이사야는 포로 귀환 후 재정착을 위해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혔던 백성들을 대상으로한 메세지를 주로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제3이사야는 유다인들의 본토 재정착과 재건을 위한 메세지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3이사야는 바벨론에 의해서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한 예식과 각종 종교적 의식들이 재정비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또한 위로의 말씀을 통하여 공동체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경고의 말씀을 통하여 지난날 이스라엘의 과오를 돌아보게 함과 동시에 또 앞 날의 각오를 다지게 하기도 한다. 이에 더하여 제3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우주적 절대자로서 이 모든 역사의 주관자로 인식하게 하며, 따라서 온 세상이 하나님을 따르게 될 것임을 선포한다.

4. 그러나 이러한 메세지가 과연 바벨론이 아시리아의 속국 신세였던 시절의 남왕국 유다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전 글에서 밝힌 것처럼 원이사야는 아시리아를 통한 하나님의 징계가 유다에 임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담고 있다. 그는 바벨론이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제2이사야는 바벨론에 멸망당한 유다의 회복에 대한 예언을 다루고 있고 제3이사야는 포로 후기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만일 역사적 실존으로서의 이사야가 제2, 3이사야의 모든 내용을 다 예언했다면, 이는 이사야가 아시리아를 통한 징계 뿐만 아니라 유다의 멸망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이사는 마치 예레미야와 같이 절박한 심정으로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울부짖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이사야는 바벨론의 시대까지는 보고 있지 않다. 무슨 의미인가?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이사야는 현존하는 이사야서 전체를 쓴 것으로 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5. 기독교인들이 성격 각 권의 저자를 이해하는 방식은 대단히 단순하다. 그러나 이사야를 포함한 모든 성경 본문들의 형성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다. 그 복잡한 형성 과정을 모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성서 학자들은 그 과정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성경 형성 과정을 정확무오하게 알아야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형성 과정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기독교인을 우매화 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왜곡된 역사 위에 기독교 신앙을 세우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존속을 위태롭게 한다.

6. 이사야가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그 형태의 이사야서를 쓴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성경의 권위를 깍아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성 교회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느낀다. 그 이유는 성경의 권위가 오로지 성경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역사적으로 추호의 틀림도 없는 사실이라는 왜곡된 믿음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7. 우리는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다. 전문적 지식은 더 이상 그 분야의 전문가들만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학적 전문 지식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젊은 기독교인들은 결국 성서에 대한 선입견을 벗는 과정을 스스로든, 왜곡된 지식을 고수하다가 타의로 무너지든 한번의 해체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무너질 것인가? 스스로 선입견을 벗고 새롭게 태어날 것인가?

4 thoughts on “이사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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