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결혼(40세), 이삭이 자식을 얻음(60세), 이삭의 유언(100세), 이삭의 임종(180세)
창 25:20에 따르면 이삭은 40에 아내 리브가를 맞아 들였다. 리브가는 오랫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마침내 야곱과 에서를 낳았는데, 그때 이삭의 나이가 60이었다(25:26). 에서는 40세가 되었을 때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했는데(26:34), 이때 이삭은 100세가 된다. 즉 창세기 26장은 이삭이 백 세가 된 시점에서 마무리 되며 27장으로 넘어가게 된다.
창세기 27장에 따르면 이삭은 죽음에 임박해 있을 정도로 연로한 상태였다. 그가 100세나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창 27:2에서 이삭은 스스로도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했다. 4절에 따르면 이삭은 장남 에서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별미를 해 오면 그것을 먹고 마음껏 축복을 하겠다고 말한다. 유언을 하려는 것이다. 이 역시 이삭의 임박한 임종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당시 이삭은 자기 자식을 알아 보지 못할 정도로 눈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래서 야곱이 에서처럼 꾸미고 몰래 이삭에게 갔을 때 그는 깜박 속아넘어가기까지 했다. 그후 에서는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라고 복수를 다짐했는데, 이 역시 이삭의 장례를 치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으니 창세기 27장에서 이삭은 그야말로 ‘오늘내일’하는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이삭은 27장에서나 혹은 그 다음 장에서 사망하는 것이 아니라 무려 35장에 가서야 사망한다. 창 35장은 야곱이 에서를 피해(혹은 에서처럼 헷 족속 여자를 아내로 삼지 않고 친족에게서 얻기 위해) 밧단아람으로 갔다가 거기서 네 아내와 열두 아들을 얻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던 시점이다. 그것도 바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중간에 에서와 만난 후 그는 숙곳으로 갔다가 세겜을 들러 또 벧엘로 갔다. 야곱은 벧엘에서 다시 길을 떠나 마침내 고향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돌아왔다. 이삭은 야곱의 이 모든 여정이 끝난 직후( 창 35:28)에 사망했고 그때 그의 나이는 백팔십 세였다. 그렇다면 이삭은 임종의 침상에서 무려 8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다.
죽음에 임박한 이삭에 관한 창세기의 이 기록은 과연 정확한 역사적 사실일까? 누군가에겐 80년이면 일평생보다 길 수도 있는 기간인데 이삭이 연로하여 잘 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8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록이다. 성경의 기록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관점일 수 있으나 반드시 고민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즉 성경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는 관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만일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 역사를 왜곡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매우 엉뚱한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삭이 27장에서부터 35장에 이르는 80년의 기간 동안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로 보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장수의 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삭은 저주를 받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 저주를 받았을까? 문자주의가 일으키는 이런 일련의 의문들은 이삭을 부당하게 죄인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자기의 삶에 혹은 누군가의 삶에 적용하여 현재의 삶을 있지도 않은 죄의 결과로 해석하게 될 수 있다. 성경 본문 해석에 있어서 정답과 오답을 분명히 가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문자주의는 적어도 방법론적으로 큰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