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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야기의 전개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하여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라반은 야곱에게 아무 대가를 주지 않고 일을 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이런 식으로 부려 먹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야곱에게 품삯을 정하자고 제안했다. 이때 야곱은 그가 첫눈에 보고 반했던 라반의 둘째 딸 라헬과 결혼하는 것으로 7년 품삯을 대신하겠다고 답했다. 라반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야곱의 제안이 파격적이어서 쉽게 그 제안에 동의했고, 야곱은 7년이라는 긴 세월을 라헬을 얻기 위해 라반을 위해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라반의 욕심은 그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야곱이 사랑에 눈이 먼 남자라는 사실을 이용하면 그의 두 딸을 이용해 7년이 아니라 14년까지도 무급으로 일을 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약속한 7년이 지난 후 결혼식 때 라반은 약속했던 라헬이 아닌 레아를 야곱에게 주었다. 지난 7년간 언급하지 않았던 지역의 풍습을 들먹이며 레아를 먼저 줄 수밖에 없다고 둘러댔다. 그리고는 7년을 더 일을 하면 라헬도 주겠다고 새로운 계약을 제안했다. 야곱은 라헬을 위해 지난 7년을 견뎌왔기 때문에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야곱은 라반의 꾀에 넘어가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을 무급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2. 이해의 관점과 문제점 – 소유물로서의 여성
이 이야기는 라반과 야곱의 관점에서 주로 회자된다. 라반이 얼마나 악독했는지, 혹은 7년을 단 며칠 같이 여긴 야곱의 라헬에 대한 사랑에 주안점을 두고 이 본문을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아쉬움이 있다. 왜냐하면 이 관점은 야곱과 라반의 거래에 소유물로 인식되고 있는 여성에 대한 아무런 비판적 해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 속 고대 사회에서 여성은 집안의 우두머리인 사람(소위 가장이나 족장)의 소유물이었다. 이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라는 계명에 아내와 남녀 종들을 탐하지 말라라는 세부 규정에도 드러나 있다. 라반은 자신의 딸과 그 딸들의 시종들까지 모두 소유하고 있었고 그 소유권을 야곱에게 이전할 권리도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야곱이 라반의 집에 도착한 후 한 달간 야곱과 라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이 둘은 이미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고 야곱이 일방적으로 라헬을 좋아했던 것일 수도 있다.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아버지가 라헬을 야곱에게 주어도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야곱과 라헬의 관계 속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라헬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라헬의 운명은 전적으로 아버지와 야곱과의 거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라헬이 야곱과 사랑에 빠져 당장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해도 라반은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 하기 위해 절대 결혼을 허락해 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라헬은 자신의 결혼식날 종적을 감추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언니가 먼저 자기 남편의 아내가 되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별다른 절차도 없이 라헬은 7일 후에 그냥 야곱에게 주어졌다. 아버지의 욕심을 채워주는 대가로 남편을 빼앗겼고 언니를 잃었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려는 꿈도 잃었다.
레아의 경우는 더욱 비참하다.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의 소유가 된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처절하게 동생과 경쟁했지만 결국 남편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평생을 자기 동생과 자기 남편 사이를 부러워하며 소외감 속에 살아야 했던 것이다. 레아와 라헬의 시종이었던 실바와 빌하의 삶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레아와 라헬의 소유로서 야곱에게 주어져 강제로 대리모 역할을 했고, 자기가 낳은 자식들을 자기 주인에게 바쳐야 했다. 그들은 한 인격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3.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야곱은 레아와 라헬 외에 그들의 시종까지 합하여 네 여성으로부터 열두 아들을 얻었고, 그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니 어떤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신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놓여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즉 신앙적으로 보자면 신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감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평가이다. 신의 섭리 가운데 있었다는 말로 이 여성들을 위로하기에는 그들의 삶이 너무나 비참하다. 성경에서 위대한 신의 사역자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신의 계획에 헌신하여 과업을 성취한다. 그 과정은 괴롭지만 그만큼 보람된 것임을 알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라는 위대한 신앙의 고백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분명한 인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야곱에게 아이를 낳아 준 네 여성들은 이런 인식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처절하게 살아갔을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그들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하여도 그들은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두 지파의 형성에 기여했다는 보람을 느낄 수 없었다.
우리는 성경이 고대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는 문서임을 인식하고 현대인의 윤리적 관점으로 그것을 평가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고대의 세계관을 현대 사회에 무리하게 적용하여 여성을 대상화하는 몰지각에 빠지게 되거나 여성의 희생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우리는 남성이 여성을 소유하고 통제해 왔던 것이 잘못임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여성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부장제도 아래 수단화되었던 많은 여성들의 강제된 희생을 주목해야 하며 애도해야 한다. 나아가서 칸트가 정언명령으로 가르쳐 준 것처럼 사람이 타자를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언제나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
부록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요셉은 두 지파로 나뉘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총 열세 지파로 구성되었고, 므낫세 지파는 또 요단 동편 지파와 서편 지파로 반씩 나뉘었으므로 가나안 정복 후의 이스라엘은 모두 열네 지파로 나뉜 셈이다. 하지만 레위는 땅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땅 분배는 열세 지파에게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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