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9:20에 따르면 요셉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 창 40:3에 따르면 요셉이 바로의 신하들을 만나게 된 감옥은 친위 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이었다. 그렇다면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39:20)이 다름 아닌 ‘친위대장의 집에 있는 감옥’이다. 그런데 이렇게 두 구절의 장소를 동일시하는 것은 그리 자연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39장에서 요셉이 갇힌 곳은 친위 대장의 사적 공간이라기보다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공식적인 감옥이며 관리도 간수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에 40장에서 바로의 신하들이 갇히게 된 곳은 ‘친위대장의 집에 있는 감옥’, 즉 사적 공간이며 관리도 친위 대장이 직접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39장에서 요셉은 간수장의 눈에 들어 일반 죄수들과 동일하게 취급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리자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40장에서 요셉은 ‘친위대장의 집’에 있는 옥에 갇혀 친위대장에 의해 직접 관리를 받았는데, 친위대장은 요셉이 자기 아내를 성폭행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특별 지위를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죄수를 수종들게 했다.
이러한 서사상의 부자연스러움은 이미 여러 번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문서가설’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이 글의 주안점은 서사상의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므로 더 깊이 언급하지 않고 넘어 가도록 할 것이다. 이제 요셉이 옥에서 만난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에 대해 알아 보자.
1. 술 맡은 자/술 관원: mashqe, mashqim (마쉬케, 마쉬킴/cupbearer, cupbearers)
누명을 쓰고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갇힌 요셉은 그곳에서 왕의 죄수 두 명을 만나게 된다. 하나는 술 맡은 자이며 다른 하나는 떡 굽는 자이다. 두 사람을 통칭하여 소개하는 용어로는 ‘두 관원장‘(2절)이라는 표현이 쓰였으며 히브리어로는 ‘사리스‘이다. 보디발을 바로의 ‘신하’라고 소개한 창 39:1에 쓰인 표현과 같은 단어이다(이 용어의 의미와 쓰임새에 대해서는 이전 글을 참고하라). 첫 번째 인물만을 소개하는 표현은 משקה(마쉬케)이며 한글로는 ‘술 맡은 자'(1, 5, 13)로 번역되었다. 이 사람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표현은 שר המשקים(사르 함마쉬킴)이며 한글로는 ‘술 맡은 관원장'(2, 9, 20, 23)이라고 번역되었다. ‘사르’는 보디발을 지시하는 말로 나올 때 ‘친위대장’이라고 번역했으나 특이한 경우였고 다른 경우는 대체로 어떤 집단이나 조직의 ‘장’을 뜻하는 표현이다(이 역시 이전 글에서 이미 설명했으니 참고하라). ‘함마쉬킴‘에서 ‘함’은 관사에 해당하며 ‘마쉬킴‘은 앞서 언급한 ‘마쉬케‘의 복수형이다. 즉 ‘사르 함마쉬킴‘은 술 맡은 자들의 장, 곧 술 맡은 관원장이 된다.
한국 개신교 문화에서 ‘술’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술’은 생각보다 긍정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요셉이 만난 ‘술 맡은 자’는 잘 알려진 것처럼 비록 옥에 갇히긴 했으나 곧 복직되어 다시 바로의 수종을 드는 업무를 하게 되었고, 또 요셉이 바로에게 등용되는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 포로 귀환 당시 예루살렘 성벽 재건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왕실에서 ‘술 맡은 자’였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 1:11 (개역개정)
그리고 솔로몬이 애굽의 스바 여왕에게 자랑스럽게 보여 준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모습 속에 언급되는 직책 중에도 ‘술 맡은 자’가 포함되어 있다.
4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왕궁과 5 그 상의 식물과 그의 신하들의 좌석과 그의 시종들이 시립한 것과 그들의 관복과 술 관원들과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크게 감동되어 6 왕께 말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사실이로다
왕상 10:4-6 (개역개정)(cf. 대하 9:1-5)
이처럼 ‘술 맡은 자’는 구약성경에서 비교적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2. 떡 굽는 자(빵 굽는 자): ofeh, ofim(오페, 오핌/baker, bakers)
요셉이 옥에서 만난 다른 한 사람은 바로의 음식을 맡은 사람으로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떡 굽는 자’라고 표현했다. ‘떡 굽는 자’의 히브리어는 אפה(오페)이며(1, 5, 13) ‘떡 굽는 관원장'(2, 16, 20, 22)으로도 표현되어 있으며, 히브리어로는 (שר האפים)’사르 하오핌‘, 즉 ‘장’을 뜻하는 ‘사르‘와 관사+복수형인 ‘하오핌‘을 합성한 형태의 표현이 쓰였다.
한글 성경이 처음 번역되었던 시기가 19세기 구한말 상황이었기 때문에 ‘빵’과 같은 외래 문명에 익숙하지 않았던 한반도 초기 기독교인들은 여러 가지 용어들을 토착화하여 번역했는데 그중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떡’이다. 지금은 ‘빵’이 매우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생소한 음식이어서 ‘오페‘는 ‘빵’이 아닌 ‘떡 굽는 자’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이 어색한 것은 떡을 굽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떡을 다시금 구워 조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란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페‘는 ‘떡 만드는 자’라고 하는 것이 낫다. ‘떡’ 외에 토착화된 다른 용어로는 거문고, 팥죽, 비파 등 어휘들을 들 수 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떡 굽는 자는 술 맡은 자와 대조된 운명에 처한다. 술 맡은 자는 살았지만 떡 굽는 자는 죽게 된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구약성경에서 ‘떡 굽는 자’는 그리 긍정적으로 그려져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삼상 8:11-22은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을 향해 사무엘이 답변하는 내용인데, 그는 왕이 권력을 사용해 백성들을 괴롭힐 것이라고 말하며 왕을 요구하지 말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왕이 권력으로 노동을 착취할 것에 대하여 예를 드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오페‘, 즉 ‘빵 굽는자'(baker)이다. 아마도 지금과 같이 먹기 좋은 밀이 없던 시절, ‘에머밀'(emmer)을 다듬어 힘겹게 빵을 만들어 먹어야 했던 것 때문에 빵 만드는 일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고대 제빵 관련 아티클은 여기를 보라). 현대 사회에서 ‘베이커’는 (물론 힘든 일이긴 하지만) 그 전문성을 인정받는 그럴듯한 직업이지만 고대에는 고생스럽고 천시받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삼상 8:13 (개역개정)
또 다른 예는 호세아 7장 4절과 6절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성욕처럼 끌어 오르는 죄를 향한 욕망과 ‘빵 굽는 자’의 화덕을 비교하고 있다.
그들은 성욕이 달아오른 자들이다. 그들은 화덕처럼 달아 있다. 빵 굽는 이가 가루를 반죽해 놓고서, 반죽이 발효될 때를 제외하고는 늘 달구어 놓은 화덕과 같다…… 6 새 왕을 세우려는 자들의 마음은 빵 굽는 화덕처럼 달아 오르고, 그들은 음모를 품고 왕에게 접근한다. 밤새 그들의 열정을 부풀리고 있다가 아침에 맹렬하게 불꽃을 피워 올린다.
호 7:4 , 6 (새번역)
예외 적으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는 용례가 예레미야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사실 딱히 긍정적으로 쓰였다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예레미야 37장에는 입바른 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예레미야를 옥에 가둔 시드기야가 그가 옳은 소리를 했음을 깨닫고 다시 그를 불러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묻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때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다시 옥에 가두지 않고 근위대의 뜰에 머물 수 있는 일종의 특혜를 주며 또 ‘빵 굽는 자의 거리'(baker’s street)에서 빵 한 덩이씩 매일 주도록 지시한다. 여기서 ‘오페‘는 예레미야의 생존을 도왔던 직책이기 때문에 나름 긍정적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빵 굽는 자’의 역할이 중점이 아니기 때문에 딱히 긍정적 묘사가 나타난 것으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시드기야 왕은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려, 예레미야를 근위대 뜰에 가두고, 그 도성에서 양식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빵 만드는 사람들의 거리에서 빵을 매일 한 덩이씩 가져다가 예레미야에게 주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예레미야는 근위대 뜰 안에서 지내게 되었다.
렘 37:21 (새번역)
정리
이상으로 요셉이 옥에 갇혔을 때 만난 두 사람에 대해 알아 보았다. 술 맡은 자는 개신교인들이 가진 선입견과는 달리 그리 나쁜 직책이 아니며 심지어 느헤미야도 술 맡은 자였다. 반대로 빵 굽는 자는 업무의 강도도 높고 (추측이긴 하지만) 사회적으로도 다소 천시받는 직업이었던 것 같다. 애굽의 시바 여왕에게 이스라엘의 영광을 보여 주며 자랑스러워했던 솔로몬도 술 맡은 자는 자랑했지만 빵 굽는 자를 자랑하지는 않았고, 예레미야가 생존할 수 있게 도왔던 베이커들도 사실 죄수를 도와 주는, 어찌 보면 천한 일을 했을 뿐, 대단히 고상한 직책의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바로의 관원으로서 ‘빵 굽는 자’는 천시받는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어쩐 일인지 같은 날 같은 잘못으로 옥에 갇힌 술 관원장과 달리 빵 관원장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왠지 빵 맡은 자들이 술 맡은 자들에 비해 차별을 받은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