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마당 124호
선지식 해체와 의미의 재구성
창세기 3장을 중심으로
한국성서학 연구소, 『성서마당』 124호, 2017년 겨울호에 실린 저의 글을 소개합니다. 대중을 위한 성서학 매거진 『성서마당』은 ‘설교를 위한 성서 연구’라는 코너를 통해 설교자들이 쉽게 성서학 연구 결과를 접하고 이를 토대로 설교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제 글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 글이 마음에 드신다면 매거진을 구독하여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일반적으로 교리를 강화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본래 ‘읽기’란 본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융합되는 것(fusion of horizons, Gadamer)이며, 따라서 읽기는 정해진 답을 찾는 것이 아니다. 사실 성경 읽기도 당연히 성경 본문과 독자의 만남을 통해 다양한 의미를 발생시켜야 하는데, 현실은 교리에 갇혀 있어서 사실상 ‘읽기’라는 행위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나는 이 원고를 통해서 너무도 잘 알려진 창세기 3장, 선악과 사건이 얼마나 교리적 선지식에 갇혀 그 본문이 가질 수 있는 다채로운 의미를 제한하고 있는지 보여 주려고 했다.
창세기 3장은 인류의 원죄를 다루는 본문으로, 과거 가부장적 질서가 보편 정서이던 시절, 왜 여성이 남성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왜 여성이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고, 왜 여성이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말해 주는 본문으로 인용되던 본문이다. 그리고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러한 관점이 ‘성경적’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여성 목사 안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성경적인 행위도 아니다. 하지만 장로교 통합측을 포함한 다수의 교단에서는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고 있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믿는다. 각각의 견해는 자기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임을 증빙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양립 불가능한 경우 두 견해 사이 어딘 가에 진리가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누군가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교리’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일 수 없으며, 마치 루터가 잘못된 교리와 싸우기 위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던 것처럼 언제나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해 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교리가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해서이다.
나는 이 글에서 창세기 3장이 얼마나 선입견에 갇혀 오인되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지를 논하여 성경 읽기가 ‘읽기’로서의 본질을 회복해야 하며 그러한 읽기를 통해 발생하는 의미에 합리적인 태도로 반응하고 때로 교리적 읽기를 수정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했다. 만일 교리적 읽기가 대안적 읽기에 한발자국도 양보할 수 없다면 중세의 가톨릭 교회가 교권을 행사하여 개혁자들을 억압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