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구약학자들의 시편 설교

Excerpt

2018년 ‘통합구약학회'(장로교통합측구약학자모임)에서 발간한 『구약학자들의 시편 설교』 중 저의 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와 ‘우리는 꿈을 꾸는 자들과 같았다’를 소개합니다.
구약학자들의 시편설교

구약학자들의 시편설교

한들출판사 2018

2018년 ‘통합구약학회'(장로교통합측구약학자모임)에서 발간한 <구약학자들의 시편 설교>를 소개합니다. 이 책에는 저의 설교문이 두 편 실렸습니다. 첫 번째 설교문은 시편 111편을 본문으로 쓴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의 글이며, 두 번째 설교문은 시편 126편을 본문으로 한 “우리는 꿈을 꾸는 자들과 같았다”입니다.

This post introduces you to a book, a collection of articles (or sermon manuscripts) on the book of Psalms written by the Korean Hebrew Bible scholars who belong to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I contributed to this book with two sermon manuscripts; the first is on Ps 111, entitled as “Where are we going?” following Paul Gauguin’s famous painting,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the other one is on Ps 126 entitled as “We were like Dreamers.”

지혜시, 시편 111편

시편111편은 흔히 ‘지혜시’라는 장르로 분류하며, 본문 메시지의 핵심은 야웨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제가 이 시편 설교문을 통해 전달하려고 했던 교훈도 당연히 야웨를 경외함, 즉 신앙심을 갖는 것이 세상의 모든 지혜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흔해 빠진,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저는 그 흔해 빠진 이야기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결코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그의 책 <호모 데우스>에서 종교의 존재 문제에 대해 매우 위협적인 생각을 상당히 설득력있게 설명합니다. 과거에 당연히 신의 영역으로 이해되던 것들, 예컨대 장수와 단명, 질병의 확산, 자연 재해, 전쟁의 위협, 가뭄 등 나약한 인간이 생존에 있어 신의 가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이제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대부분 상당히 극복이 되어 더이상 신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생존과 번영을 추구해 갈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더이상 신에게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맡길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라리는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은 인간의 지혜만 있으면 더이상 ‘야웨 경외’, 즉 지혜의 근본을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만듭니다. 하라리는 유명한 학자이자 작가인 만큼 그가 퍼뜨린 생각은 분명 널리 수용되고 있을 것입니다. 

구약학자들의 시편설교 목차
저는 하라리의 생각을 단지 신앙적 관점에서 덮어놓고 부정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기독교인들이 4차산업혁명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이룩해 온 모든 ‘지혜’가 야웨 경외’ 사상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우리가 되돌아 볼 부분은 과연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과 지혜가 과연 인간의 삶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고대 사회의 인류가 가졌던 많은 문제들을 극복해 냈지만, 또 다른 많은 문제들을 만들기도 했고, 그 문제들을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설교문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높은 수준의 자살률에 대하여 언급하며 인간의 지혜가 이루어낸 것이 갖는 한계에 대하여 단적으로 보여주려고 했고, 여전히 ‘야웨 경외’는 신앙을 가진 자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임을 역설하고자 했습니다.

Ps 111 is normally categorized as a “Wisdom Poem.” and its core message is to promote “the fear of the LORD.” I, of course, tried to deliver the same message, the importance of the fear of the LORD, through my writing. It is perhaps cliché, a boring sermon. Nevertheless, I wanted to say that the message of the fear of the LORD should not be a banality these days. In his famous book, HOMO DEUS, Yuval Harari very convincingly argued about the problem of the very existence of religion or religious beliefs. Humans have overcome the problems that are considered to be under God’s control in the past, such as longevity, pandemic, natural disasters, wars, and drought, to name a few. Harari’s insight urges us to think that we no longer live in a world where we need to rely on God’s mercy to secure our life and prosperity. Thus, the value of the fear of the LORD is significantly reduced or maybe nothing. And I think it is not wise to ignore or deny Harari’s ideas. Rather, I think we must honestly face the fact that, as Harari argues, the wisdom of humanity weakens the value of the fear of the LORD these days. However, we must also speculate about newer problems that we, maybe with our own wisdom, constantly create. Korea is a well-developed country in many ways, including medical science, politics, culture, technology, etc. But at the same time, the suicide rate in Korea is the highest in the world, and I think this indicates the limitations of human wisdom. So what I tried to show my reader is that, even though human wisdom seems to solve many problems of the past, we still need to value the fear of the LORD more than anything.

시편 126편, 꿈을 꾼다는 것의 의미

구약학자들의 시편 설교 시편 126

인용으로 소개를 대신 합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에서를 피해 도망가던 야곱은 ‘루스’라는 곳에 이르러 밤을 맞이합니다. 안락한 집을 두고 혈혈 단신의 몸으로 도망쳐 나와 갖가지 위험에 노출된 상태로 노숙하게 된 야곱의 상황은 ‘포로’ 신세가 되었던 유다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꿈’을 주십니다. 야곱의 사다리 꿈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주실 희망을 바라보는 ‘회복의 꿈’으로 이어집니다. 야곱은 이곳을 ‘벧엘’이라고 이름 짓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망자 신세로부터 다시 ‘회복’ 시키실 것을 ‘꿈’꾸게 됩니다…… 시편 126편의 기자가 포로 귀환 사건을 가리켜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얼떨떨했다고 표현하지 않고) “우리는 꿈을 꾸는 자들 같았다”고 귀환자들의 ‘정체성’에 대해 말한 이유는 역경 중에 회복의 꿈을 꾸었던 야곱의 삶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미 ‘회복의 꿈’을 유다에게 주신 바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꿈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았고, 바로 그 하나님이 자신들에게도 예레미야를 통하여 계시하셨음을 믿었으며 그 계시를 꿈으로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끝까지 인내하여 하나님이 주신 극적 회복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귀환자들은 꿈을 꾸듯 감격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야곱처럼 “꿈을 꾸는 자들”이기도 했고 결국 야곱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을 경험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유다의 포로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회복의 꿈을 계속 꾸며 간직할 수 있었을까요? 이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백석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용이 맘에 드신다면 구매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