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도서. . . 흥미로운 해석의 난제들이 참 많은 책이다. 그 중에서도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는 이 글의 독자로서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숙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인공의 정체가 당연히 솔로몬이라고 믿고 쭉 그렇게만 생각을 해 온 사람이라면 이 글의 주인공의 정체가 궁금하지도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 글이 그렇게 흥미로운 난제를 담고 있는 책인지 아마 잘 느끼지 못할 수 도 있다.
만일 당신이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면 이 글은 전도서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겁먹을 것은 없다. 단지 우리는 성경 본문의 역사에 한 발짝 다가갈 뿐이다.
2. 코헬렛은 이전 글에서 이미 설명한 것 처럼 전도서의 주인공이다. ‘전도서’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말 역본들에서는 이 주인공을 거의 ‘전도자’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코헬렛이란 말은 사실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가톨릭 성경에서는 전도서를 ‘코헬렛’이라고 칭하고 있고 물론 그 주인공 역시 ‘코헬렛’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이 ‘코헬렛’이라는 표현을 천주교에서는 이미 사용하고 있는 듯 하고, 따라서 ‘코헬렛’이란 말이 한국기독교인들에게 아주 생소한 표현은 아닌 듯 하다.
(참고로 가톨릭 성경은 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지난 2005년 ‘성경’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펴낸 역본을 ‘성경’이라는 단어가 너무 포괄적이어서 대안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
3. 그런데 전도서라는 책이 구약성경에서 잠언 다음에 나오는데다 이 책의 서두에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전도자의 말이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 이 책의 독자들은 전도자(코헬렛)라는 표현은 무심코 지나가고 오로지 다윗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는 ‘솔로몬’만을 떠올리게 된다.
잠언도 솔로몬의 책이라고 첫 머리에 소개되어 있는데다가 그 다음에 나오는 책도 다윗의 아들이 쓴 책이라고 소개를 하니 자연히 이 책이, 전도자(코헬렛)가 누구건 간에, 솔로몬의 책이며 소위 ‘전도자’는 솔로몬이 스스로를 그렇게 칭한 것이라는 정도로 여기게 된다.
4. 이 구절 말고도 이 책의 첫 부분에는 솔로몬을 연상시키는 내용들이 꽤 나온다. 일단 1:12–2:26을 보면 우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마치 솔로몬과 같이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 덕에 자신은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열왕기에서 솔로몬의 말년에 대해 부정적으로 그리듯 전도서에서도 이 전도자라는 자는 그렇게 부와 명예를 한 껏 누린 삶이 결국 덧없고 의미 없었음을 깨닫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보면 이 글은 정말 솔로몬의 글처럼 보인다. (참고로 열왕기에서 그리고 있는 솔로몬의 이야기도 현대 사회에서 정의하는 혹은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쓰여진 소위 ‘역사’로 인정받으려면 고대문헌들을 비교하여 역사적 사실성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 이야기는 일단 제쳐두자)
5. 하지만 학자들은 이 부분을 ‘Royal fiction'(왕실 허구)이라고 부른다. 풀어보자면 이글은 실화가 아니라 솔로몬의 왕실을 연상시키는 소설 혹은 허구라는 것이다. 왜 학자들은 늘 이렇게 불경스런 생각들을 서슴치 않고 말하는 것일까?
6. 과연 이 글이 솔로몬의 글인지 아닌지 한 번 차근차근 알아보자. 이 글의 주인공이 솔로몬이라는 정황적 근거는 이미 소개를 했다. 하지만 이 정황적 근거가 솔로몬 저작설이라던가 이 글의 화자가 진짜 솔로몬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누구든 솔로몬인척 글을 쓸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 글의 주인공이 진짜 솔로몬인지는 사실 알 수가 없다.
7. 거기에 더해 이 글에서는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잠언에서는 그나마 ‘솔로몬의 잠언’이란 표현 정도는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선 아니다. 솔로몬이란 이름은 이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코헬렛이란 말이 등장할 뿐이다. ‘코헬렛’이 무엇인지는 이전 글에서 설명을 했으니 여기선 생략한다. 아무튼 코헬렛은 솔로몬이 확실히 아니다. 그는 그냥 코헬렛이다. 그런데 코헬렛은 왜 솔로몬이 아닌가?
8.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며 기원전 10세기 경의 인물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000여년 전의 인물인 것이다. 모든 글은 그 시대를 담는다. 우리가 TV에서 혹은 영화관에서 보는 많은 시대극들 혹은 공상과학 영화나 극들은 지금과 전혀 다른 시대를 그리고 있는 듯 보이지만 종종 그 핵심에는 현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사상에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뭔가 다르게 그리게 하려고 하는 부분 마저도 사실 은연 중에 그 저자의 시대를 종종 발설하게 된다. 전도서도 예외는 아니다.
9. 학문적으로 전도서의 저작 연대를 측정하는 일은 상당히 논란이 많이 되었던 것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학자들 중 전도서의 연대를 기원전 10세기로 추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본문 2:5과 8:11에는 각각 ‘파르데심‘(파르데스의 복수형, 과수원)이라는 단어와 ‘피트감’(평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 단어들은 페르시아 외래어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의해서 멸망당한 시기가 대략 기원전 6세기 경이며, 이어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이기고 중동세계를 제패했던 시기가 대략 5세기 이후이다.
전도서에 페르시아에서 빌려온 외래어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 글이 솔로몬의 시기, 즉 통일 왕국 이스라엘의 왕정 초기에 쓰여진 책일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뜻하며 나아가서 이 두 페르시아 단어가 본래 있던 히브리어를 대체하고 유대인들의 문화에 자리잡을 정도의 시간을 고려한다면 이 책은 아무리 일러도 기원전 5세기 이전에 쓰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전히 약간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이 글은 기원전 3세기정도로 여겨진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나치게 학문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생략) 솔로몬이 이 책을 썼을 가능성이 만무하다면 도대체 왜 이 주인공은 자신이 다윗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했을까?
이제 나의 독자들은 이런 것들에 대한 대답을 해주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고 읽는 사람의 판단과 해석에 달린 문제기 때문에 미안하게도 여기선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코헬렛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솔로몬인척 하여 글을 전개하였으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이 글을 썼는지 상당히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솔로몬이 아닌 누군가가 기원전 3세기 경에 이 책을 썼다고 상상하며 이 책을 읽는다면 전도서가 주는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thoughts on “솔로몬인가 코헬렛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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