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나는 이미 ‘여호수아와 신명기’라는 제목과 주제로 두 개의 글을 올렸다. 그 글의 주된 관심은 ① 신명기가 앞선 네 권의 책(창~민)과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과 ② 여호수아서는 소위 ‘신명기적 역사’의 일부분으로서 신명기와 깊이 연관된다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이번엔 방향을 정반대로 잡아 보았다. 즉 여호수아서가 신명기라는 특정 본문과만 관련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네 권(창~민)과도 관련된다는 것이다. 마르틴 노트는 그가 ‘신명기적 역사’로 분류한 전기예언서들(수, 삿, 삼, 왕)을 말 그대로 ‘신명기적'(Deuteronomistic)이라고 이해했고, 후대의 많은 학자들도 (다양한 비평을 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신명기적 역사’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그래서 여호수아를 포함한 소위 ‘신명기적 역사서들’은 ‘신명기적’이라는 면에서 일관성을 보여줄 것이라는 오해를 일으키게 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여호수아나 혹은 다른 신명기적 역사서들은 ‘단성'(homophonic)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다성'(polyphonic)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수아서의 실체를 보기 위해 반드시 여호수아서와 오경 전체의 연관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그와 관련한 단편적인 예 세 가지만 들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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