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편집되었다

Excerpt

현대의 책들과는 달리 성경책은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쓰고 고치고 삭제하고 덧붙여 현재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 결과 성경은 한 사람의 저작을 읽을 때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포스트는 성경이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한 가지 예를 예레미야 본문을 통해 보여 준다.

들어가는 말

나의 박사 학위 논문은 제안서를 작성하기 시작(2013년)하여 제출을 완료(2016년)하기까지 약 3년의 시간이 걸렸다. 학위를 받은 후 이 논문을 다시 책으로 출판하기까지 걸린 시간도 무려 2년이다. 나의 책 Reanimating Qohelet’s Contradictory Voices: Studies of Open-Ended Discourse on Wisdom in Ecclesiastes가 내 머리 속에서 단행본으로 완성되어 나오기까지 약 5년이 걸린 셈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많은 글을 썼고, 지웠고, 고쳤고, 또 고쳤다. 정말 지겹도록 많이 수정을 했다. 하지만 편집을 하며 나는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었고, 그것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반복된 단락들은 잘라 내어 더 간결하게 만들었고, 부족하다 싶은 부분은 자세한 설명을 더했다. 나의 첫 책은 이렇게 오랜 ‘편집’의 과정을 거쳤고 그만큼 논리적으로나 명료함의 측면에서 더 나아졌다. 

성경도 복잡한 편집 과정을 거쳐 완성된 책이다. 하지만 성경은 논문이 아니다. 편집이 되었지만 단독 저자가 퇴고를 거듭하여 완성시킨 일관성있고 논리적인 저작물이 아니다. 성경은 어떤 하나의 책이라 하더라도 많은 경우 여러 편집자들의 손을 거쳐 수정되었다. 어떤 편집자들은 때로 내용을 삭제하거나 추가했고, 그렇게 성경은 현재의 상태가 되었다. 복수 작가들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하나의 책 안에도 사상과 생각의 흐름이 변하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서로 상충되는 경우도 있다.

현대인들은 성경이 현대의 저작물과 유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예레미야의 손으로 쓰였기를 바란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나는 이미 오경에 관한 여러 글을 통해서 오경이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거나 다양한 편집자들의 손을 거쳤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경이 흔히 알려진 것처럼 모세라는 단일 저자의 책이 아니라 다양한 저자와 편집자들에 의해 집대성된 책이라는 말이다. 성경의 다른 책들도 사실 대부분 마찬가지이다. 오늘 이 포스트에서는 오경 외의 본문에서도 그런 특징이 발견된다는 것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편집의 흔적: 예레미야 23장과 33장의 비교

예시 본문의 주인공은 예레미야 23장 5-6절과 33장 14-16절이다. 본문을 보자.

예레미야 23장(개역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레미야 33장(개역개정)

14 strong>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일으킬 것이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위 본문에서 굵은 글씨로 처리한 부분이 같거나 유사한 부분이며 그 외에는 다르거나 어느 한쪽에만 있는 부분이다. 이제 자세히 비교해 보자.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일으킬 것이다(그런데 무엇을 일으키나?).

• 위 문구는 히브리어 본문의 23장과 33장에 동일하게 나타난 부분이다. 여기에는 ‘일으키다’라는 동사가 두 본문 모두에 등장하지만 그 목적어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 23장: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 33장: 선한 말을 일으킬 것이라

• 23장에서는 ‘다윗에게(다윗을 위해)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33장에서는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에게 했던 선한 말을 일으킬 것’이라고 되어 있다. * 주의: 개역개정의 번역에서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라고 표현한 것은 의역이다. 원문에는 ‘일으킨다’라는 표현이 두 본문 모두에 쓰였다.

• 이 본문은 같은 듯하지만 사실상 매우 다르다. 23장은 다윗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언약, 즉 다윗 왕가의 영속성을 상기시키는 반면, 33장은 왠지 다윗 왕가의 영속성을 굳이 언급하지 않으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23장 5절의 후반절은 다윗을 잇는 유다의 왕이 탄생할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반면에 33장은 이스라엘과 유다에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만 하고 있다.

2.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싹트게 하리라)… 그가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 위 문구 역시 23장과 33장에 유사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다음을 보라(두꺼운 글씨는 유사한 부분이며 보통 글씨는 다른 부분이다).

⁃ 23:5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다–>33:15 의로움의 가지를 싹나게 할 것이다.

⁃ 23:5 내가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다–>33:14 내가 선한 말을 일으킬 것이다

• 일반적으로 같은 동사(일으키다)에 다른 목적어를 쓴다든지 혹은 유사 어구(의로운 가지)에 다른 동사를 쓴다든지 하는 것은 단일 저자의 글에서도 단조로운 글에 변화를 주기 위해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위 본문의 경우 변화환 어휘는 단순히 표현을 다양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신학 혹은 의미를 표출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편집의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어떤 면에서 그런지 자세히 살펴 보자.

⁃ 23장의 ‘의로운 가지’ = 왕(“그가 왕이 되어…”) = 야웨께서 일으키실 인물

⁃⁃ 고대 사회에서 신께서 ‘일으키실’ 인물이 ‘왕’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 집단의 공식적 표명

⁃ 33장의 ‘의로운 가지’ = 야웨의 선한 말을 성취하는 인물 (왕이라는 묘사 없음) = 싹트게 될 인물 ->정치적 의도 없음

• 23장의 표현은 매우 정치적 발언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33장은 정치적 독립을 상징할 수 있는 표현을 피하려고 하는 의도에서 편집이 이루어졌다.

3.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예루살렘이) 평안히 살 것이며

• 이 부분 역시 표현은 비슷하지만 의미상으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선 23장의 ‘평안’과 33장의 ‘안전’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동일한 어휘인데 번역에서 표현이 달라졌다. 따라서 ‘구원을 받고 평안히/안전하게 살 것’이란 표현은 두 본문이 같다. 그러나 그 대상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부분에서는 두 본문이 나뉜다. 23장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모두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33장은 이스라엘을 언급하지 않고 대신 예루살렘을 추가했다. 그 의도는 아래에서 설명하겠다.

4. 여호와는 우리의 의(누가 혹은 무엇인 그렇게 불리게 될까?)

‘야웨는 우리의 의’(야웨 칫케누/치드케누)라는 표현은 두 본문 모두에 등장한다. 그러나 무엇이 혹은 누가 ‘야웨 칫케누’라고 일컬음을 받는가에 대해 두 본문은 전혀 다른 대상을 지목한다. 23장에서 ‘야웨 칫케누’라는 별칭을 갖는 인물은 당연히 ‘의로운 가지’로 소개된, 다윗을 잇는 통일 왕국의 왕이 될 인물이다. 야웨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이며, 그는 왕이 되어 유다와 이스라엘을 구원한 후 통일 왕국을 재건하여 다윗 시대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며 백성들 모두가 다시금 평안하게 살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왕은 ‘야웨 칫케누'(여호와는 우리의 의)라고 불릴 것이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그가(야웨) 그를 ‘야웨 칫케누’라고 부를 것이다”이다.

• 그러나 33장의 ‘의로움의 가지’는 애초에 왕으로 소개되지 않았다. 물론 그도 야웨께서 말씀하신 선한 일을 성취할 것이며 유다의 백성들로 하여금 평안히 살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정치적 독립이나 왕국의 건설이 아니라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는 일,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물은 ‘야웨 칫케누’라고 불리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야웨 칫케누’는 예루살렘의 별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해당 부분의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야웨) 그녀(예루살렘)를 ‘야웨 칫케누’라고 부를 것이다”. 

33장에서 이스라엘이 빠지고 대신 예루살렘이 들어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본문이 포로 후기, 특히 헬라 시대의 편집으로 삽입된 것이라면 편집자의 시대는 ‘이스라엘’이 이미 없어진지 오래이며 적은 인구만이 헬라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여 살던 시대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대신 예루살렘을 넣은 것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로움의 가지’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성취할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 예루살렘은 평안해 질 것이며, 따라서 특정 인물이 아니라 그 도시의 별칭이 ‘야웨 칫케누’가 된다. 

33장에서 이스라엘이 빠지고 예루살렘이 들어간 이유는 회복될 왕권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비록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아름도운 도시의 이야기로 바꾸기 위함이다. * 주의: 히브리어 본문(33:16)에는 ‘성읍’이란 표현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대신 예루살렘(여성 단수 명사)을 지시하는 대명사 그녀(3인칭 여성 단수)가 쓰였다. 개역개정에서는 이를 ‘성읍’으로 바꾸어 번역했다.

나가는 말

예레미야 23장과 33장을 비교해 보았다. 매우 유사한 구절들이라 의미상으로도 큰 차이가 없고 단지 표현만 약간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본문이다. 하지만 이 두 본문의 속사정은 사뭇 다르다. 23장 5-6절은 보다 이른 시기의 본문으로 왕국 회복을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33장은 왕국 회복의 예언이 성취되지 못한 어떤 시기(아마도 기원전 3세기경 혹은 헬라 시대)의 어떤 편집자/작가가 23장 본문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삽입한 본문으로 보인다. 33장 본문을 더 후대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콘라드 슈미트(Konrad Schmid)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예레미야서 전체의 그리스어 번역이 히브리어 본문에 비해 약 3000 단어 정도 더 긴데 그렇게 길어진 본문에 33장 14-16절의 내용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예레미야서가 현재 모습을 갖추기 전에 이미 그리스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본문에는 33장 14-16절 내용이 들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예레미야서의 그리스어 번역이 기원전 3세기보다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33장 본문은 그리스어 번역보다 후대인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삽입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Konrad Schmid, “How to Identify a Ptolemaic Period Text in the Hebrew Bible” in Times of Transition: the Early Hellenistic Period (Philadelphia: Penn State University Press, 2021), 281-291).

우리는 글을 쓸 때 퇴고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글을 일목요연하게 만들고 군더더기 없게 만드는 일이다. 물론 고대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퇴고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남긴 작품들은 후대의 자른 저자들 혹은 편집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의 책에 다양한 사상과 생각을 반영하는 매우 특이한 본문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단일 저자가 쓴 현대의 책과는 다른 특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만 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성경 전체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오롯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책이며, 다양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고, 때로 그 사상들은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런 책에서 하나의 통일성을 찾아 내려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복잡한 책을 단순화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곡해일 수 있음을 고민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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