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번역 시리즈(6):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 3:11)

Excerpt

전 3:11의 영원을 사모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이 말은 영생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아가 원문에는 ‘사모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를 파헤쳐 보자.
뫼비우스의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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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전도서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본문 3:11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독특한 표현을 기억할 것이다. 영원을 사모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혹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생’을 염원한다는 말일까?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사후세계나 특히 ‘영생’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본문은 ‘영원’이라고 표현하지 ‘영생’이라고 표현지 않는다. 더구나 ‘사모한다’는 표현도 원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무슨 뜻이며,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지 알아 보자.

맥락

전도서 3장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상의 모든 일들과 이에 대하여 무지한 인간에 대하여 말한다. 먼저 3:1의 도입부를 시작으로 3:2-8에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간결한 운문이 등장하며, 그 뒤로 9절부터는 앞선 운문에 대한 일종의 해설이 산문 형태로 나타난다. 이 해설에서 코헬렛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다 때를 따라 아름답게 일어나고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하지만, 아쉽게도 인간은 그것을 사실상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이렇다. 3장 앞 부분에서 코헬렛은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고 말하는 등 세상만사 모든 일이 다 신의 정하신 때를 따라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9절부터 돌연 코헬렛은 사람이 수고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다소 맥락에서 벗어난 듯한 말을 내밷는다. 그리고 이어서 그 유익이 없는 모든 수고가 사실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며 사람은 그 일을 하느라 고생을 한다고 말한다(10절).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코헬렛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개역개정, 전 3:11

코헬렛에 따르면 신은 모든 일들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일어나도록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의 맥락이 매우 어색하다. 왜냐하면 코헬렛은 그 직전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고생스런 일을 주어 애쓰게 하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런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3장 1절에서 8절까지의 ‘때’에 대한 운문에서 말하는 것도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관념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운문에서 코헬렛은 인생의 긍정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경험까지도 모두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죽이는 일, 세운 것을 허는 일, 슬픈 일, 우는 일, 버리는 일, 찢는 일, 미워하는 일, 전쟁하는 일 등이다. 이런 맥락에서 11절 전반부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는 표현은 신앙적 신념에 따른 기계적인 고백이거나 나쁘게 보면 비꼬기일 수도 있다. 즉 우리말 표현 중에 ‘참 자알 한다’라던지 혹은 ‘잘 먹고 잘 살아라’라던지 하는 표현들은 잘 못하고 있는 상황이나 잘 살지 못하기를 바라는 상황에서 쓰는 표현인 것처럼 ‘때를 따라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별로 아름답지 않은 상황이거나 혹은 도대체 뭐가 아름답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한다면, 11절의 하반절을 이해하기 수월해 진다. 코헬렛은 지금 세상의 모든 일들을 신이 관리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는 분명 아름답게 펼쳐져야 할 세상의 모든 일들이 도대체 뭐가 아름다운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과거로부터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의 긴 시간에 대한 관념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으나, 정작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벌이시는지, 즉 죽고 죽이며,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일들이 왜 그 시간에 그렇게 일어나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로 코헬렛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라고 말한 것이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사모하는 마음’은 원문에 없어서 꺽쇠 처리했다)

나의 해설과 『개역개정』 번역은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그러니 도대체 어떤 원문에서 이런 번역이 나온 것인지, 혹은 정말 내 해설이 맞는 것인지 의아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제 그 부분을 구체적으로 다뤄 보겠다.

원문의 의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실 원문에는 ‘사모하는 마음’이란 표현이 없다. 해당 구절을 대충 직역하면 일단 아래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때에 맞게 아름답게 만드셨다; 또 사람에게는 영원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은 시작부터 끝까지 찾을 수 없다.

코헬렛은 하나님이 ‘영원’ 그 자체를 마음에 주었다고 말하지, 그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제 ‘영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 보자.

‘영원’은 히브리어로 עלם(올람)이다(더 흔한 철자법은 עולם이지만 이 구절에서는 짧게 쓰였다; 발음은 같다) . 이 어휘는 현대인이 이해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의 개념과는 달리, 단지 매우 긴 시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11절 후반절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직역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이란 표현이 바로 עלם(올람)의 개념을 드러낸다. 『개역개정』에서 사용한 ‘시종’이란 표현은 문자적으로는 ‘시작부터 끝’이라는 말이므로 적절한 번역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시종’은 ‘계속’이란 의미로 주로 쓰이기 때문에 혼란을 야기한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부분은 ‘시종’이란 표현이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점과, 또 이 개념이 עלם(올람)으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종합해 보면, 코헬렛은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기나 긴 역사’를 עלם으로 표현했고, 하나님이 바로 그 עלם(올람)을 인간에게 주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에 대한 관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그 과정에서 하시는 일 자체는 이해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로 11절을 다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모든 것을 때에 맞게 아름답게 만드셨다; 또 사람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시간으로부터 그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의] עלם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인간은 [עלם에 대한 이해 능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과정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꺽쇠에 들어간 부분은 원문에 없는 부연 설명임

이어지는 의미의 문제

결국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따라 ‘아름답게’ 일어난다는 코헬렛의 말은 좋게 보아도 그가 직접 관찰하고 이해한 바를 말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신앙을 기준으로 기계적으로 고백한 말일 뿐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코헬렛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현실을 보며 ‘참 아름답게 잘도 돌아간다’라며 비꼬듯 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나아가 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עלם(올람)을 이해하는 능력을 주었지만, 그 긴 세월 동안 일어나는 ‘죽이고, 살리고, 울고 웃는’ 모든 일들이 왜 그렇게 일어나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한다. 만일 세상의 모든 일들이 신적 질서를 따라 정의롭게 일어나고 있어 보였다면 코헬렛은 신의 역사(役事)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수고가 무엇이 유익하냐고 허탈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코헬렛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자기가 가진 종교적 신념과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관찰했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수고하는 모든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허탈해 하며(9절), עלם(올람)을 가졌으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없다고 탄식하는 것이다.

부연 설명 및 결론

전도서 3장 11절의 번역에서 한 가지 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이 구절에는 전반절(인간이 영원을 이해할 수 있다는 부분까지)과 후반절(인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없다는 부분)을 잇는 부분에 등장하는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without’을 의미하는 전치사 מבלי(밉벨리)와 관계대명사 which에 해당하는 אשר(아쉐르)가 그것이다. 영문으로 직역하면 ‘without which’가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without which’와 같은 류의 구문에는 반드시 선행사가 특정되어야 하는데, 3장 11절은 선행사가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직역을 하면 말이 되지 않으며 문맥상의 선행사를 임의로 추가하여 번역해야만 한다. 3장의 내용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상의 모든 일들, 특별히 그 일들이 일어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아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선행사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문으로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다:

knowing the right time that God appointed, without which they (humans) can not find what God has done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이런 방식으로 11절을 한글로 다시 표현해 보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3:11 이해를 위해 3장 전반부를 함께 포함시킴)

3:1-8 해 아래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낳을 때-죽을 때, 심을 때-뽑을 때. 죽일 때-치료할 때, 부술 때-세울 때, 울 때-웃을 때, 슬플 때-기쁠 때, 던질 때-거둘 때, 떠안을 때-멀리할 때, 찾을 때-포기할 때, 지킬 때-버릴 때, 찢을 때-꿰맬 때, 침묵할 때-말할 때, 사랑할 때-미워할 때, 전쟁-평화

9. 노동하는 자에게 일의 유익이 무엇인가? 10. 나는 신이 인간에게 시달려 보라고 주신 과업을 보았다. 11a 그는 모든 것을 퍽이나 아름답게 만드셨구나;

11b 또 그는 사람에게 영원(모든 일이 일어나며 그 역사가 돌고 돌아 반박되어 긴 시간이 흐르는 것)을 이해하게 하셨다. 그러나 정하신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게 하시어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그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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