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종교화 시대의 개신교 교회(2)

Excerpt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수직적이던 조직 문화는 수평적으로 변화하고, 일과 삶의 균형도 중시하는 분위기가 자리잡아 간다. 그러나 목회자의 삶은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있다. MZ세대 목회자를 필요로하는 지금 그들이 목회할 만한 환경은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이다.

탈종교화 시대의 개신교 교회(2)

두 번째 이야기: 부목사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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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목사의 현실

요즘 괜찮은 일반 직장은 최소한 토요일과 일요일을 쉬고 월차도 쓸 수 있다. 조직 문화도 꽤 수평적이 되어 간다는 소리가 들린다(물론 나이든 꼰대, 젊은 꼰대는 여전히 어디나 있다). 여기저기서 기업의 조직 문화를 혁신하니 효율이 좋아 지고 실적이 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교회는 사정이 다른다. 부목회자들은 월요일 하루만 공식적으로 쉴 수 있다. 월차는 (보편적으로는) 개념 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월요일 하루 쉬는 것도 장례 등 비상 업무는 수시로 있는 것이어서 한 달에 네 번 쉬는 날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 사례비를 많이 받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미래의 담임 목사 후보생인 부목사들은 학력도 중요하다. 그들도 미래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큰 교회는 일단 박사를 찾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교회가 적어도 Th.M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부는 단순히 스펙을 쌓기 위한 것은 아니다. 학문적 역량은 목사에게 중요한 소양이다. 고학력 사회인 한국의 상황에서 교역학석사 공부 3년 한 것으로 평생 목회를 감당하기는 부족하다. 그러니 부목회자들이 바쁜 와중에 계속 학업을 유지하는 것은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그래서 부목사는 대학원 공부(Th.M, Ph.D 등)도 병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당연히 시간적, 금전적 여력도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부를 해야 하며, 당연히 집중할 수도 없다.

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을 통해 얻게 되는 효율을 추구하게 되었고, 지시보다는 수평적 관계에서 나오는 소통의 효과를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목회자 세계의 조직 문화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그들의 삶의 질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젊은이들이 목회자의 세계에 뛰어들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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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더 들어가 보자. 첫 번째 포스트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사회의 ‘탈종교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많은 교회들이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당 수는 사라져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과거 경제 성장기에는 교회도 성장기였다. 개척을 해도 ‘성장’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목회에 뛰어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나방이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머지않아 사라질 위험에 처한 조직에 나와 내 가족의 목숨을 거는 것이다.

더이상 목회자로 살아남기 어렵다면 신학교에 지원하는 사람도 줄 것이고 자연히 신학교도 축소될 수밖에 없다. 교회의 양적 성장 둔화가 불러온 효과다. 목회자가 현격히 줄어들고, 교회도 자연히 줄어들 것이다. 악순환은 가속화 될 것이다.

더 나은 교회는 양질의 목회자를 필요로 한다. 탈종교화 사회에서 선뜻 목회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그런데 목회자 삶의 질은 별로 개선되고 있지 않다. 지금의 목회자의 삶은 MZ세대가 납득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러니 새롭게 목회를 하겠다는 사람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양질의 목회자를 만나기 점점 어려워 진다. 그러니 교회는 더 나은 기독교인을 배출해 내기 어려워 질 수밖에 없다.

불투명한 미래를 알면서도 목회에 헌신하려는 MZ세대에게 적어도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목회 환경은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마저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요즘 같은 탈종교화 시대에 어느 누가 목회자의 세계에 뛰어들려 하겠는가? 목회자가 점점 없어 지는데 어떻게 교회가 존속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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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이전 포스트에서 나는 세속화의 물결을 경계하고 기독교의 참다운 가치를 실현하는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선 목회자의 금전적, 시간적 보상이 없이 양질의 목회자를 양성해 내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목회자의 세속화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결혼한 목회자가 자식을 낳고 살면서 어느 정도 평범한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세속화’가 아니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부의 불평등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그 구조의 가장 밑바닥 차지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바닥에 위치해야 할까? 그래야만 목회자가 세속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큰 교회의 목회자는 비교적 풍요롭게 산다.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과도한 부의 축적과 대물림은 경계해야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적정 수준의 대우를 받는 것까지 비난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세속화는 유물론적 인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즉 물질을 자신의 판단과 행동의 근간으로 삼는 원초적 인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물질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의지를 가지고 더 이상을 추구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래야 신앙을 생활로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물질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MZ세대가 미래 개신교 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조직 문화와 그들에 대한 처우가 적어도 현재 ‘상식’으로 여겨지는 정도로 개선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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