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종교화 시대의 개신교 교회(1)

Excerpt

한국 개신교는 주술적 기복신앙에 의존하여 양적 성장을 크게 이루었다. 탈종교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복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종교보다 세상의 방법이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더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복신앙은 결국 탈종교화를 가속화 시킨 꼴이 되었다.

탈종교화 시대의 개신교 교회(1)

첫 번째 이야기: 유물론적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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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해가 밝은지 2주일 정도가 지났다. 내가 태어났던 1970년대의 사회와 현재를 비교해 보면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 대한민국에 민주적 가치관이 자리잡아가고 있고, 눈부신 기술 발전 덕에 경제적 여건이 좋아져 삶은 확실히 풍요로워 졌다.

삶이 여유롭다보니 사람들은 점점 종교를 멀리하게 되었다. 특히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을 오래 겪으면서 기존에 교회에 출석하던 성도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당연히 개신교의 출석 교인들은 크게 줄어 들었다. 교회를 가지 않으니 여러 가지로 편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헌금으로 나가던 돈을 가족을 위해서 혹은 여가를 위해서 쓸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교회에서의 복잡한 인간관계에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어 졌을 것이다. 교회를 막상 안나가 보니 단점을 별로 없는데 장점은 많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교회를 다니던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종교사회학자들은 ‘탈종교화’ 혹은 ‘세속화’라는 주제로 종교를 가진 인구의 감소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나는 코로나를 겪으며 나타난 단편적 예를 들은 것일 뿐이지만 탈종교화 현상은 사실 몇 년 사이 갑자기 찾아 온 불청객이 아니다. 유럽 사회에서 오랫 동안 진행되어 온,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던 현상이며, 그것이 우리에게도 찾아 온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결핍을 신적 은총에 기대어 해결하고 싶어 했다. 과학기술과 의학 등의 급격한 발전은 삶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신뢰할 만한 해결책을 주었다. 반면에 ‘신의 손길’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불확실했으며 많은 경우 기대하는 결과를 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세속화와 탈종교화는 일어날 수밖에 없다.

Currier & Ives,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조금 학술적인 표현으로 이야기해 보자. 교회는 유물론적 기독교인을 양성했고, 그들은 더이상 교회를 필요로하지 않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관념론이 지배하던 유럽 사회의 인간관에 역행하는 유물론적 인간관을 주장했다. 인간 행동은 기저에는 정신(혹은 이상)이 자리잡고 있다기보다 물질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로 불리는 패트릭 헨리(위 그림)는 ‘나에게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런 인간은 정신을 중시한다. 이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태도라면 인간은 관념론에서 주장하는 인간관이 맞다. 성도로 치자면 ‘환난과 핍박 중에도’ 신앙을 지키는 사람이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한 사람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이 그렇게 고상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물질이다. 인간은 고결한 양심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라면 양심과 원칙도 저버릴 수 있는 존재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의 신앙은 환난과 핍박 중에는 지키기 어렵다. 오히려 안전과 번영을 약속해 줄 때 종교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말로는 부인할지라도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다. 탈종교화 시대가 이를 방증하고 있다.

교회가 유물론적 기독교인을 양성했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유물론적 인간, 즉 그냥 보통의 사람이면서 교회의 구성원이기도 한 성도를 양성했다는 말이다. 물질에 따라 움직이는 그들은 신의 은총을 통해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기독교 정신이 그들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의 손길’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는 확실한 결과를 준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은 자신의 요구가 교회가 아닌 세상 속에서 더 확실히 충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 탈종교화 현상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tree of love
사랑은 가장 명확한 기독교의 가치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목회자는 어떤 목회를 해야 할까?) 탈종교화가 심화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과거의 교회처럼 양적 성장을 위해 발버둥치는 일은 실효성이 없을 것 같다. 90년대까지의 개신교 성장과 달리 최근 큰 교회들의 양적 성장은 다른 교회 교인의 유입일 뿐이다. 좋게 말해 수평 이동이고, 나쁘게 말하면 성장이 아니라 남의 교인 뺏어오기다. 한 교회가 망하면 다른 교회가 흥하는 식이다.

결국 답은 기독교가 참다운 기독교의 가치를 찾기 위해 힘쓰고 그것을 진정성 있게 실천하는 일이다(위 그림 참고).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양적 성장은 기독교의 참다운 가치를 실현하여 세상으로부터 그 노력을 인정받을 때 따라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결과 중 하나이지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목적은 아니다.

세속화, 탈종교화의 시대가 교회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응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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