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번역 시리즈(9): ‘전도자’의 성(性)

Excerpt

전도자로 흔히 알려져 있는 ‘코헬렛’이라는 히브리어는 ‘분사의 여성 단수 형태’이다. 문법적으로 여성인 단어는 흔히 여성 단수 형태의 동사를 취하는데, 전도서에서 ‘코헬렛’은 ‘다윗의 아들’로 등장하기 때문에 남성 단수 동사와 함께 쓰인다. 그런데 7장 27절은 예외로 여성 단수 동사가 쓰였다.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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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브리어의 성별

히브리어는 문법상의 ‘성별’ 구분이 발달해 있는 언어이다. 그런데 우리말은 성별이 발달해 있지 않다. 즉 구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할 때 히브리어의 문법적 성별 구분을 한글로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구약성경의 한글 번역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간혹 번역에서 원문에 포함되어 있는 성별을 보여 줄 수 없어 아쉬울 때도 있다. 예컨대 חכמה(호크마)는 여성 명사이며 지혜라는 뜻을 갖는다. 이 어휘는 잠언 8장에서 의인화되어 나타나는데, 문법적 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의인화된 지혜 역시 ‘여성’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한글 번역에서는 이런 부분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구절을 보면 히브리어의 성별을 구분하는 것이 본문 이해에 있어 중요할 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개역개정 잠 8:17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는 자를 만나 주신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더더욱 아니다. 여성으로 의인화된 חכמה(호크마), 즉 지혜가 하는 말이다. 소위 ‘지혜 여인'(Lady Wisdom)은 8장 전체를 통해 배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자신에게 초대하며, 자신을 가지라고 설득하는데, 잠언에서 배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결혼을 앞둔, 아직 미성숙한, 사내 아이들, 즉 ‘아들’이다. 안타깝게도 잠언은 고대의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딸은 교육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 잠언의 현자들은 혈기왕성한 아들들에게 지혜를 마치 ‘여인’을 사랑하듯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거룩한 성경에 성적 묘사(eroticism)가 들어 있다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겠으나, 구약성경은 사실 다채로운 수사적 기법을 동원하여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책이다. 그중 하나가 이런 성적 묘사인데, 성별 구분이 없는 우리말의 경우 히브리어의 성별 구분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2. 전도자의 성(性) 문제

히브리어는 동사에도 성별의 구분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주어의 성이 남성이면 동사도 남성이어야 하고, 주어의 성이 여성이면 동사도 여성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사실 주어와 동사의 성별 일치는 본문의 의미에 크게 영향을 주는 부분은 아니다. 히브리어 문장에서 주어와 동사의 성이 일치하는 일반적인 경우나, 서기관의 실수로 생긴 주어-동사의 성별 불일치는 번역에 있어 대부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의도적으로 불일치 시키는 경우는 본문의 의미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성별이 발달하지 않은 우리말로는 이런 부분까지 살려 번역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별도의 해설이 필요하다. 전 7:27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전도자가 이르되 보라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연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개역개정

전도서의 주화자인 코헬렛은 문법적으로는 여성형이지만 다윗의 ‘아들’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의미상 분명히 남성이다.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경우 보통은 문법적 성을 따르지 않고 내용상 인물의 실제 성별을 따라야 한다. 따라서 전 1:2, 7:27; 12:8의 ‘전도자가 이르되’라는 표현에서 ‘이르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אמר(아마르)는 3인칭 남성 단수여야 한다. 하지만 이 세 본문 중 1:2와 12:8만 코헬렛을 남성으로 받아 3인칭 남성 단수 형태의 אמר(아마르)를 썼고, 7:27은 특이하게도 코헬렛을 이 어휘의 문법적 성별인 여성으로 간주하여 3인칭 여성 단수 형태인 אמרה(아므라)를 썼다. 

전 7:27에서 동사 אמר가 여성형으로 나타난 것은 본문을 기록한 저자/편집자가 그 주어인 קהלת(코헬렛/코헬레트)를 분사의 여성형으로 인식하고, 코헬렛이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여 실수로 잘 못 적은 것일 수 있다(물론 문법적으로는 하자가 없으나 의미상 남성이 분명하기 때문에 동사를 남성으로 적어야 했다). 그러나 과연 저자/편집자가 실수로 코헬렛을 여성 동사로 받았을까? 저자/편집자는 의도적으로 여성형을 썼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 근거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히브리어 동사의 가장 단순한 기본 형태는 1인칭 단수가 아니라 ‘단순능동 완료 3인칭 남성 단수’이다. 굳이 3인칭 여성 단수를 만들려면 기본형에 접미사를 붙여 변화를 주어야 한다. 코헬렛의 경우 3인칭 남성 단수, 즉 기본형을 쓰면 되는데, 가장 단순한 형태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 굳이 여성형 단수를 써서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

둘째, 코헬렛은 이 글의 주변 인물이 아니라 주화자이며, 처음부터 다윗의 아들이자 통일 왕국의 왕이었던 솔로몬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표현과 내용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저자/편집자가 코헬렛을 단지 어휘가 여성형으로 쓰였다는 이유로 여성으로 혼동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또한 본문 어디에도 코헬렛을 생물학적 여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암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편집자가 코헬렛을 여성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

셋째, 전 7:23-29은 코헬렛이 스스로 지혜를 가까이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자신에게 진정한 지혜가 없음을 토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 코헬렛은 ‘지혜 없음’과 ‘여성’을 연결시키고, 이에 더하여 코헬렛 자신을 동사의 여성형을 사용함으로 ‘여성화’하여 코헬렛의 ‘지혜 없음’을 암시하려고 한다. 7:27의 ‘이르되’에 기본형이 아닌 3인칭 여성 단수를 사용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 보자.

이 단락에서 ‘지혜 없음’과 ‘여성’을 연결시키려는 의도는 여성을 잠언의 음녀(אשה זרה, 잇샤 자라)를 연상시키는 표현들(올무, 그물, 포승, 사망보다 더 쓴 여인)을 사용하여 묘사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아래를 보라). 또한 ‘남자’와 ‘여자’를 흔히 사용하는 איש(이쉬, 남자)와 אשה(잇샤, 여자)로 쓴 것이 아니라 모두 창세기 3장(지식의 나무를 범하고 저주를 받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용어인 아담(אדם, 개역개정에서 ‘사람’)과 하잇샤(האשה, 개역개정에서 ‘그 여자’)로 사용한 것은 지혜를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하잇샤’가 먹었으나 이것이 그를 진정한 지혜로 인도해 주지 못했다는 해석에 기반하여 ‘여성’과 ‘지혜 없음’을 연결시키려는 암시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여자란 죽음보다 쓰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는 올가미, 그 마음은 그물 그 손은 굴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만 죄인은 그에게 붙잡히고 만다.

가톨릭 성경 코헬렛 7:26

내 영이 줄곧 찾아보았지만 나는 찾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천 명 가운데 남자(아담) 하나를 찾아내었지만 그 모든 이들 가운데에서 여자(하잇샤)는 하나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가톨릭 성경 코헬레 7:28

위 구절들만 따로 놓고 보면 코헬렛이 마치 여성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 구절들이 속한 단락의 맥락은 여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코헬렛은 자신이 지혜롭고자 애썼으나 결국 지혜롭지 못하다는 자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코헬렛이 뜬금없이 여성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창세기 3장에서 하잇샤, 즉 하와가 코헬렛처럼 지식을 탐하였으나 결국 진정으로 지혜로워지지 못했다는 본문 해석 때문이며, 아울러서 당시의 여성에 대한 보편적인 비하 의식(잠언에 반영된 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코헬렛 자신을 여성화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자신에 대한 비하의 방식이며, 지혜 없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다시 말해서 분사의 여성 단수 형태를 가진 ‘코헬렛’은 비록 다윗의 아들로서, 생물학적 남성(sex)이지만 지혜로움에 있어 사회적 여성(gender)으로 평가하려는 것이다. ‘코헬렛’은 ‘하잇샤’처럼 혹은 잠언의 음녀처럼 결코 지혜롭지 못하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전 7:27의 אמר(아마르)의 여성형은 우매한 여성으로서의 코헬렛을 보여 주려는 수사적 도구로 의도적으로 쓰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나가는 말

이러한 문법적, 수사적 기교를 한글로 충실히 옮기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러나 각주나 그 밖의 해설을 통해 번역이 전달할 수 없는 히브리어 본문의 숨겨진 의도와 의미를 제공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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